지난 게시판/우리말은 재미있다(장승욱)

158 – 이판사판

튼씩이 2019. 9. 24. 08:12

마리는 머리털의 옛말이다. 옛날 궁중(사전에는 그냥 궁중이라고 돼 있어서 그것이 조선의 궁중인지, 아니면 고려, 신라, 백제, 고구려의 궁중인지, 그것도 아니면 발해, 말갈, 옥저, 동예의 궁중인지 알 길이 없지만)에선 머리칼을 마리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리는 또한 옛날 시의 편수를 세는 단위였다. “여보게, 시 한 수 읊어보세”가 아니라 “여보게, 시 한 마리 읊어보세”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시의 편수를 세를 단위를 한자말 수(首)로 굳어졌고, 마리는 짐승이나 물고기, 벌레 같은 것을 세는 말로 용도 변경됐다. 지금에 와서 수(首)는 마리와 같은 뜻으로도 쓰이지만, 두(頭)는 수나 마리보다 범위가 좁아서 소나 말 같은 짐승을 세는 단위로 쓰이고 있다. 수(首)와 두(頭)는 같은 뜻이지만 미묘하고도 큰 차이가 있다. 수도(首都)라는 말은 있지만 두도(頭都)라는 말은 없으며, 두목(頭目)이라는 말은 있어도 수목(首目)이라는 말은 없다. 두목이라는 말이 있으니 <두사부일체>라는 영화 제목이 가능한 것이지, 두목 대신 수목이라는 말이 쓰였다면 무슨 경찰 영화도 아니고 <수사부일체>가 뭐냐 말이다. 우두머리를 뜻하는 한자말들을 사전에서 살펴보면, 두목은 그냥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돼 있는데, 수괴(首魁)는 ‘못된 짓을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명토 박아 놓았다. 하기야 들여다보면 그게 그거다. ‘착한 짓을 하는 무리’를 패거리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두목은 또한 예전에 무역을 목적으로 중국 사신을 따라온 북경 상인을 이르던 말이었다고도 한다. 수령(首領)은 ‘한 당파나 무리의 우두머리’, 두령(頭領)은 ‘여러 사람을 거느리는 우두머리’인데, 두령은 아무래도 산채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수와 두가 짝짓기한 수두(首頭)는 ‘어떤 일에 앞장서는 사람’, 수두를 뒤집은 두수(頭首)는 ‘여럿의 우두머리’ 또는 ‘절에서 모든 일을 주관하여 처리하는 직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판사판의 말밑이라는 사판(事判)과 비슷한 뜻을 가진 말이 두수다.



이판사판 (명)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


쓰임의 예 ★ 선거철이 되니 온갖 파렴치한 인물들이 다 나서서, 아직 구린내도 다 가시지 않은 어색한 웃음을 헤프게 날리고 있어 보는 이를 역겹게 하고 있다. 이판사판, 아니 영락없는 개판이다. (인터넷신문 데일리안의 기사 <염치를 알아라>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마리 – 머리털의 옛말. 옛날 시의 편수를 세는 단위. 짐승이나 물고기, 벌레 같은 것을 세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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