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우리말은 재미있다(장승욱)

159 – 거섶

튼씩이 2019. 9. 25. 08:12

쌍둥이 말의 세계를 기웃거려 보자. 가수 이미자 씨를 ‘엘레지의 여왕’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해진다. 토박이말로 엘레지는 물론 비가(悲歌)가 아니기 때문이다. 엘레지는 개의 연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자말로는 구신(狗腎)이라고 불리는 물건이다. 비가(悲歌)와 구신(狗腎)이라니, 튀어도 너무 튀는 한쌍의 바퀴벌레가 아닐 수 없다.


엘리지의 예로 알 수 있듯이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는 쌍둥이라기보다는 동명이인(同名異人)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사리나 도사리, 거섶 같은 말들의 다양한 쓰임새를 그 본보기로 들 수 있다. 나는 김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세 사람 알고 있는데 한 사람은 저명한 건축가, 한 사람은 군대 시절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고참 병장, 나머지 한 사람은 『페이퍼(PAPER)』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는 ‘백발두령’, 바로 그 김원이다. 이 세 사람은 이름이 같다는 것뿐 아무런 인연도, 관계도(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갖고 있지 않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동음이의어들의 관계도 이 동명이인들의 관계와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동음이의어들끼리 관계를 맺어주기 위해서는 약간의, 또는 상당한 수준의 억지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광음(光陰)과 광음(狂飮): 광음(狂飮)은 술꾼들이 광음(光陰), 즉 세월을 견디는 방법.


사장(社長)과 사장(死藏): 사장(社長)은 부하 직원들의 능력을 사장(死藏)시키는 대가로 높은 급여를 받는 사람.


동정(童貞)과 동정(同情): 잃어버려도 아무도 동정(同情)하지 않는 것이 동정(童貞).


원고(原稿)와 원고(ONE GO): 원고(原稿)는 고스톱에서 점수가 나서 한 번 고를 외친 상태. 점수가 추가되어 한 번 더 고를 부르는 것을 투고(投稿)라고 한다.



거섶 (명) ① 흐르는 물이나 둑에 스쳐서 개개지 못하도록 둑 가에 말뚝을 늘여 박고 가로로 결은 나뭇가지.


              ② 삼굿 따위의 위에 덮는 풀.


              ③ 비빔밥에 섞는 나물.


쓰임의 예 ★ …겨우내 얼지 않고 흐르는 여울목이 있었으며, 발 벗지 않고도 건널 수 있게 고리삭아 가는 오리나무 서너 개를 걸쳐놓은 거섶이 있었다. (이문구의 소설 『관촌수필』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엘레지 – 개의 자지. =구신(狗腎).



'지난 게시판 > 우리말은 재미있다(장승욱)'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1 – 밑두리콧두리  (0) 2019.09.27
160 – 부랴사랴  (0) 2019.09.26
158 – 이판사판  (0) 2019.09.24
157- 우두머리  (0) 2019.09.23
156 – 알짜  (0) 2019.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