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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과 왕릉, 600년 조선문화를 걷다 - 오정윤 외

튼씩이 2022. 3. 12. 09:40

 

『궁궐과 왕릉, 600년 조선문화를 걷다』는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궁궐, 왕릉, 제례공간, 상징과 조형물 중에서 공간성, 상징성과 역사적 의미, 문화적 가치, 유교의 의례와 성리학적 이념, 문물제도를 가장 잘 반영하는 주제를 선별하고, 이것을 특성에 맞추어 ①궁궐과 사람들, ②궁궐과 상징들, ③궁궐과 제도들, ④궁궐과 의례들 등 4가지로 분류하였다.

우선 ①궁궐과 사람들에서는 왕, 왕비, 왕자와 공주, 궁녀와 내시들의 삶과 역할을 조명하고, ②궁궐과 상징들에서는 용과 잡상, 전통문화원리인 주역과 궁궐을 선정하였다. 또한 ③궁궐과 제도들에서는 국가의 의례인 오례, 관리의 이력서인 품계훈작, 궁궐 정전과 한성부 등을 서술하였고, ④궁궐과 의례들에서는 왕의 업적과 칭호, 왕의 무덤인 왕릉, 종묘와 옥새 등을 다루었다. 이를 통해 600년 조선문화의 진면목과 역사적 가치, 미학적 관점 등을 가능한 통일적 입장에서 보여주고자 하였다.”    -〈머리말〉 중에서, 5~6쪽 -

 

 

왕의 하루는 파루와 함께 시작되었다. 파루는 왕이 하늘을 대신해 조선의 백성들에게 새벽을 알리는 소리였다. 새벽 4시경에 33번의 파루를 울렸다. 왕도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파루에 일어나야 했다. 왕은 파루에 일어나 기본적으로 웃어른에게 문안 인사를 올려야 했다. 바빠서 직접 인사를 할 수 없을 때는 내시를 대신 보냈다. 다음에는 경연에 참석하여 신료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현안 문제를 토론하기도 했다. 경연이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하고 조회를 했다. 조회는 매월 5일, 11일, 21일, 25일 조정에서 문무백관이 모두 참여하여 왕을 알현하는 조참과 매일매일 신료들이 편전에서 임금을 알현하는 의식인 상참으로 구성되었다.  - 32쪽 - 

왕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보다도 차기의 군주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처첩(妻妾) 과 반상(班常)의 신분적 차별이 존재하는 사대부 사회에서 군주의 후계자가 적자(適者) 인지 서자(庶子) 인지 여부는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립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요소였다. 따라서 왕비의 적장자 생산은 왕권의 정통성 수립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 51쪽 - 

왕자는 세자가 되어 왕이 되면 최상의 삶이 되는 것이고, 세자가 되지 못하면 왕가의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살면 이 역시 최상의 삶이 되는 것이다. 공주도 역시 출궁하여 일가를 이루고 평범한 아낙네의 삶을 살면 최상의 삶인 것이다.   - 67쪽 - 

좁은 의미의 궁녀라고 일컫는 나인과 상궁도 구분이 명백했다. 보통 궁녀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었었는데 상궁, 나인, 애기나인으로 나누어졌다. 이들도 입궁 시기와 소속 부서에 따라서 높낮이에 차이가 있고 그들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상궁이었다. 상궁 밑으로는 나인이 있었으며, 이들의 역할은 상궁과 거의 같았지만 주로 상궁의 보조 역할을 했다. 나인 아래에는 견습 나인인 애기나인이 있었다.   - 74쪽 -


잡상은 벽사의 기능과 더불어 기와와 추녀를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전체적인 건물의 미학을 돋보이게 하는 시각적 효과도 높다. 또한 추녀에 앉아 있는 잡상의 숫자와 크기에 따라 건물의 중요도를 알 수 있게 하여준다. 궁궐의 수호천사인 잡상은 한국의 궁궐미학을 돋보이게 만드는 문화유산이다.   - 134쪽 -


정전의 건축 양식은 궁궐의 위계나 운영 방식에서 칸수나 기둥의 배열 방식 등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형태상으로는 공통적인 모습을 보인다. 왕의 즉위식이 열리거나 순행을 나갈 때 사용하는 정전의 전문(殿門)이 있고, 담을 끼고 사방으로 ‘행랑’이 설치되며 바닥은 박석으로 깐 ‘조정’이 만들어진다. 조정 중간에는 ‘어도’와 ‘층계’가 마련되고, 그 위로 높은 단을 쌓아 평지를 만든 ‘당(堂)’이 펼쳐진다.   - 192쪽 - 


왕의 경우 전하 말고도 국왕을 상징하는 수많은 경칭(敬稱) 이 있었다. 예컨대 주상(主上), 상(上), 성상(聖上), 당저(當佇) 등이었다. 이런 경칭들은 신료들이 왕을 지칭할 때 으레 사용되었다. 전왕이 사망한 뒤에야 후계 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 현실에서 원칙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전왕이 살아 있는 데도 후계 왕이 즉위하는 때가 그런 경우였다. 이런 경우 왕위에서 물러난 왕은 상왕(上王), 노상왕(老上王), 태상왕(太上王) 등으로 불렸다.   - 234쪽 - 

 

 

묘호는 철저하게 뒤를 이은 왕 및 신료들이 결정하였다. 시호는 일생에 대한 평가로서 종묘에 고하여 조상신의 심판을 받는다는 상징 절차가 있었지만, 묘호는 그런 상징 절차도 없었다. 단지 신료들이 의논하고 이에 대해 왕이 결재하는 것이 전부였다. 마치 후임자들이 전임자의 업무 수행을 평가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정하는 것과 같았다. - 245-

 

왕의 공을 표시하는 글자는 조()였다. 묘호에 조가 들어간 왕은 혼란기에 국가를 창업하였거나 중흥시킨 대업을 완수한 왕으로 평가받았다고 할 수 있다. 왕의 덕을 표시하는 글자는 종()이었다. 종이 들어가는 묘호를 받은 왕은 조가 들어가는 묘호를 받은 왕에 비해 선대의 정치 노선을 평화적으로 계승하여 통치한 왕으로서 평가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왕의 업적을 공과 덕 두 가지만 가지고 평가하면 구체성을 잃게 마련이다. 이에 조나 종 앞에는 공과 덕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 주는 하나의 글자를 더 붙였다. - 246-

 

상위복임금님의 혼이여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복은 몸에서 빠져나간 혼이 다시 돌아와 소생하기를 바라는 뜻이며, 북쪽을 향해 부르는 것은 죽은 사람을 관장하는 신이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죽으면 북망산천에 간다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 252-

 


종묘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과 비교할 만큼 건축학적으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곳이다. 반면에 종묘를 왕의 무덤의 한 종류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공간으로도 느껴진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유교 사당이다.   - 271쪽 - 

 

흔히 옥새(玉璽)와 국새(國璽)를 이름의 뜻처럼 옥새를 옥으로 만든 조장이며 국새는 국가의 도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옥새와 국새를 혼동해서 사용했으며, 당나라 때는 새()의 발음이 죽을 사()와 비슷하여 보()로 쓰거나, 황제의 인장을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옥새로 부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는 고려 국왕의 도장이라는 뜻으로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이름의 국새를 보낸 적이 있다. , 옥새는 국새, , 인 등 다양한 이름들이 존재했으며 시대별로, 나라별로 다른 명칭을 혼용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19세기 말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면서 국새의 이름을 대한국새(大韓國璽)라 명명하였다. 또한 대한제국 선포 전 고종은 궁내부관제를 반포하면서 옥새의 다양한 명칭들에 대한 규정을 정했는데, 임금이 아닌 관료들이 사용하는 도장을 인장이라고 불렀다. 또한 재료와 상관없이 황제의 도장을 옥새라고 명명했다. 대한제국을 기준으로 옥새의 다양한 명칭을 구별하자면, 옥새와 국새는 같은 개념이며, ()은 그보다 낮은 지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어보(御寶)가 있는데, 어보와 옥새는 왕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사용 방법에 따라서 차이점을 보인다. 옥새는 행정업무와 관련되는 집무용 성격을 가진다면, 어보는 의례용이나 예물로 바쳐져 보존용의 성격을 띠었다. 흔히 국새와 어보를 통칭해 새보(璽寶)라고 한다. - 282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