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기록에서 왕의 나이 또는 왕의 수명을 높여 이르는 말로 ‘성수(聖壽)’라는 것이 있 다. 여기에서 ‘성’은 당연히 왕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수’는 나이 혹은 수명을 가리킨다. 왕이 절대적 군주로서 왕조의 존재와 망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성수’는 바로 왕조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그만큼 왕의 수명은 온 나라가 신경을 곤두세워 지켜야 할 대상이었 다. 조선시대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산 영조의 건강비결을 본격적으로 살피기에 앞서서 조선 시대 왕의 수명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영조의 83년 성수가 얼마나 특이한 일인 지를 알기 위해서다. 비록 왕들마다 그 성수의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그 장수를 지키려는 관리들이 왕의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왕의 장수를 책임진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해서 살펴야 조선시대 왕의 장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1. 조선시대 왕의 수명
조선왕조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한 왕조였다. 여기에서 왕조는 왕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를 가리킨다. 조선왕조의 역대 왕은 모두 27명이었다. 매번 선왕은 왕세자를 지명하지만 그 과정은 곧장 정치행위로 이어져서 왕실 세력의 지지와 견제라는 정치행위가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서 왕의 사망은 자연사(自然死)보다는 오히려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여러 가지 음모와 정쟁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나 독살에 의해서 일어난 경우도 많았을 가능성이 많다. 이는 조선시대 역대 왕의 수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음에 역대 왕의 수명과 재임기간을 <표1>에 소개한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은 평균 수명은 45.1세이다. 하지만 이 평균 수명을 넘어서 산 왕은 태조·정종·태종·세종·세조·중종·선조·인조·숙종·영조·정조·순조·고종·순종에 이르는 14명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조선왕조 전체 시기와 전체 인구를 사례로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이기순의 연구1)가 주목된다. 그는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족보를 대상자료로 하여 혼인·출산·수명에 대해서 통계처리를 하여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중에서 15〜17세기 남녀 평균 수명을 계산한 결과, 남자는 55.68세, 여자는 50.28세로 나왔다. 조선후기 명문가의 남자들 평균수명이 조선왕조 역대 왕의 그것보다 무려 10세 정도가 많다. 이로 미루어 조선시대 왕들이 사가(私家)의 양반 남자들과 달리 얼마나 어려운 장수의 조건 속에서 살았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고령신씨 문중에서 15〜17세기 사이에 90세 이상 장수를 한 양반 남자도 무려 18명에 이른다.2)
1) 이기순, 「조선후기 고령신씨(高靈申氏)의 혼인, 출산과 수명-봉례공(奉禮公), 북백공(北伯公), 고천군파 (高川君派)의 경우-」, 『한국사학보』10권, 2001, 108쪽.
2) 이기순, 앞의 글 106쪽.
사실 조선시대 왕가에서 왕자가 태어나면 수명이 길고 지혜가 있기를 가장 기원했다. 『세종실록』 74권의 1436년 8월 8일 기사에는 왕자의 태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나온다. “음양학(陰陽學)을 하는 정앙(鄭秧)이 글을 올리기를, 당(唐)나라 일행(一行)이 저술(著述)한 『육안태(六安胎)』의 법에 말하기를, ‘사람이 나는 시초에는 태(胎)로 인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 며, 더욱이 그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胎)에 관계가 있다. 이런 까닭으로, 남자는 15세에 태를 간수하게 되나니, 이는 학문에 뜻을 두고 혼가(婚嫁)할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欽仰)을 받게 되는데, 다만 태를 간수함에는 묻는 데 도수(度數)를 지나치지 않아야만 좋은 상서(祥瑞)를 얻게 된다. 그 좋은 땅이란 것은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 하여야만 길지(吉地)가 된다.’고 하였으며, 또 왕악(王岳)의 책을 보건대, ‘만 3개월을 기다려 높고 고요한 곳을 가려서 태를 묻으면 수명이 길고 지혜가 있다.’ 하였으니, 사왕(嗣王)의 태는 그가 왕위에 오름을 기다려 이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옛날 사람의 안태(安胎)하는 법에 어긋남이 있으니, 원컨대, 일행(一行)과 왕악(王岳)의 태를 간수하는 법에 의거하여 길지(吉地)를 가려서 이를 잘 묻어 미리 수(壽)와 복을 기르게 하소서.”
이에 근거하여 세종은 실제로 그의 왕자 19명의 태실을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원항면 선석산 일대에 배치시켰다. 풍수설에 근거하여 좋은 자리에 태실을 두어야 ‘수명이 길고 지혜가 있는’ 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조선왕실에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은 반드시 지켜지지 않았다. 앞의 <표1>에서 보았듯이 단종·예종·연산군·명종·광해군·현종·경종·헌종·철종의 9명 왕은 35세의 나이가 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알다시피 단종은 세조로부터 자살을 강요받아 죽었다. 예종은 갑자기 죽었다. 연산군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후 병으로 죽었다. 명종 역시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 광해군 역시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제주도로 귀양을 가서 죽었다. 현종도 갑작스럽게 죽었다. 경종은 병으로 일찍 죽었다. 헌종은 당뇨병으로 죽었다. 철종 역시 병으로 죽었다. 이와 같이 35세가 되지 못해 죽은 왕들을 두고 최근 독살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3)
3) 이덕일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덕일, 『조선왕 독살 사건』, 서울:다산초당, 2005; 이덕일, 『조선왕 독살 사건(2)』, 서울:다산초당, 2009. 하지만 이덕일의 주장 속에는 추정도 많이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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