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은 왕과 그 친인척이 생활하면서 국가를 통치하는 공간이다. 당연히 의식주는 물론이고 각종 의례와 관련된 행정조직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 사옹원(司饔院)은 왕과 그 가족의 식생활을 지원하는 행정부서였다. 이에 비해 내의원은 왕실의 의약을 책임진 부서였다. 이들 두 부서는 왕과 그 친인척이 궁중에서 생활할 때 마련해야 할 음식과 약재, 그리고 치료를 맡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두 부서가 바로 왕의 장수를 위해서 마련된 조직이었다.
사옹원의 출발은 조선 초기에 사옹방(司饔房)에서 시작되었다. 『태조실록』 8권에는 1395년 (태조4) 9월 29일에 “대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다. 그 규모와 구성 및 배치 상황”을 소개하면서 사옹방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 밖에 주방(廚房)·등촉방(燈燭房)·인자방(引者房)·상의원(尙衣院)이며, 양전(兩殿)의 사옹방(司饔房)·상서사(尙書司)·승지방(承旨房)·내시다방(內侍茶房)·경흥부(敬興府)·중추원(中樞院)·삼군부(三軍府)와 동서루고(東西樓庫)가 무릇 3백 90여 간이다.” 라고 적었다. 여기에서 ‘양전’은 왕이 머무는 대전(大殿)과 왕비가 머무는 중궁전(中宮殿)을 가리킨다. 곧 경복궁의 대전과 중궁전에 각각 사옹방이 설치되었다.
태종은 1405년(태종5) 10월 19일에 이궁(離宮)인 창덕궁(昌德宮)을 완공하였다. 『태종실록』 10권에서는 “이궁(離宮)이 완성되었다. 정침청(正寢廳)이 3간(間), 동서 침전(東西寢殿)이 각각 2간, 동서 천랑(東西穿廊)이 각각 2간, 남천랑(南穿廊)이 6간, 동서 소횡랑(東西小橫廊)이 각각 5간인데, 동서 행랑(東西行廊)에 접(接)하였고, 북행랑(北行廊)이 11간, 연배 서별실(連排西別 室)이 3간, 동서 행랑(東西行廊)이 각각 15간, 동루(東樓)가 3간, 상고(廂庫)가 3간이고, 그 나머지 양전(兩殿)의 수라간(水剌間)·사옹방(司饔房) 및 탕자세수간(湯子洗手間) 등 잡간각(雜間 閣)이 총 1백 18간인데, 이상은 내전(內殿)이다.”고 했다. 태종은 사옹방을 이조(吏曹)에 소속시켰다. 이로부터 사옹방은 대전과 중궁전, 그리고 세자전에 각각 설치되어 식생활을 책임졌다.
그런데 문제는 사선서(司膳署)와 중복되는 업무 때문이었다. 본래 『태종실록』1권 1392년 7월 28일의 ‘문무백관 관제’에 대한 언급에서 “사선서는 내선(內膳)을 공상(供上)하는 일을 관장” 하였다. 또 이곳에는 “영(令) 1명 종5품이고, 승(丞) 2명 종6품이고, 직장(直長) 2명 종7품이고, 식의(食醫) 2명 정9품이고, 사리(司吏) 2명인데, 권무(權務)로서 거관하게 된다.”고 했다. 조선 초기에 사옹방이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음식을 담당했다면, 사선서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식재료를 공급하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종종 사옹방과 사선서는 업무의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여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세조는 사옹방을 확대하여 사옹원으로 바꾸고 사선서를 얼음과 미곡, 그리고 왕실의 장(醬)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사선서는 사도시(司䆃寺)로 정리가 되었다. 알다시피 『경국대전』은 1485년(성종16)에 최종본이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의 사옹원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사옹원은 “어선(御膳) 지공(支供)과 궐내 공궤(供饋) 등사를 관장” 하였다. 여기에서 어선 지공은 왕·왕비·왕세자의 식사에 소용되는 식재료의 공급과 조리하는 일을 가리킨다. 공궤는 큰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대궐에 들어오는 손님을 접대하여 음식을 공급하는 일을 말한다. 사옹원에는 공식적으로 양반이 맡는 관리책임자인 관원과 노비 출신들이 맡는 잡직이 있었다. 사옹원에 소속된 벼슬아치로는 정3품인 정 (正) 1인, 종4품인 첨정(僉正) 1인, 종5품인 판관(判官) 1인, 종6품인 주부(注簿) 2인, 정4품과 종4품인 제검(提檢) 2인 등이 있었다. 또 도제조(都提調) 1인, 제조(提調) 1인, 1명은 승지인 부제조(副提調) 5인 등이 소속되었다.
관원들이 주로 관리를 맡았다면, 잡직은 오늘날 말로 조리사이다. 재부(宰夫) 1인, 선부(膳 夫) 1인, 조부(調夫) 2인, 임부(飪夫) 2인, 팽부(烹夫) 7인으로 구성되었다. 재부는 종6품으로 주로 대전과 왕비전의 수라간(水剌間)을 책임진 주방장이었다. 선부는 문소전(文昭殿)과 대전 다인청(大殿多人廳)의 주방장으로 종7품에 들었다. 조부는 종8품으로 왕비전다인청의 주방장 일을 맡았다. 임부는 세자궁과 빈궁의 주방장으로 정9품이었다. 팽부는 궁궐 내의 공관에서 주방장을 맡았던 조리사로 종9품에 들었다. 이들을 통틀어서 반감(飯監)이라 불렀다. 비록 잡직이었지만 이들 주방장들은 벼슬아치였다. 이들 아래에는 구실아치로 별사옹(別司饔), 적색 (炙色), 반공(飯工), 주색(酒色), 병공(餠工) 따위가 있었다. 별사옹은 육고기 담당 조리사이다. 원래 고려 때 별사옹을 ‘한파오치(漢波吾赤)’라고 불렀다. 파오치는 몽골어로 고기를 썰거나 조리를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것이 태종 때 궁중의 잡역을 맡은 사람들 이름을 바꾸면서 별사옹으로 되었다. 적색은 전이나 육고기 혹은 생선을 굽는 일을 맡은 조리사이다. 반공은 밥과 국을 담당하는 조리사이다. 주색은 술과 음료를 담당한 조리사이다. 병공은 떡과 과자를 담당하는 조리사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왕의 음식을 조리하는데 중요한 필요한 식재료 공급을 담당했던 사도시에는 식의라는 직책이 있었다. 식의 제도는 고대 중국의 『주례(周禮)』에서 출발한다.4) 식의는 음식 배합의 원리를 의도(醫道)에 근거하여 차리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식의는 이에 대한 지식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은 안심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세조는 1463년 12월 27일에 『의약론(醫藥論)』을 지어 반포하면서 식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의라는 것은 입으로 달게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니, 입이 달면 기운이 편안하고, 입이 쓰면 몸이 괴로워지는 것이다. 음식에도 차고 더운 것이 있어서 처방 치료할 수가 있는데, 어찌 쓰고 시다거나 마른 풀이나 썩은 뿌리라고 핑계하겠는가? 지나치게 먹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식의가 아니다.” 그만큼 식의의 역할은 중요했다.
이처럼 스스로 식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세조임에도 불구하고 1466년(세조 12) 1월 15일에 왕실의 음식을 담당했던 사선시(司膳寺)를 만들면서 식의를 폐지시켰다.5) 세조는 왜 사선시에서 식의를 폐지시킨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임금의 음식을 장만하는 부서를 독립시키고 그 대신에 의약을 전담하는 내의원에 식의 역할을 맡겼을 가능성에 대한 주장6)이 설득력을 가지는 편이다. 조선 중기 이후 식의라는 직책은 조선왕실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에 내의원의 의관들이 식의의 역할을 하였던 셈이다.
사옹원이 일상과 의례의 음식을 장만하는 역할을 했다면 내의원(內醫院)은 궁중의 의약(醫藥)을 맡은 관청이었다. 다른 말로 내국(內局)이라고도 불렀다. 1392년(태조1)에 설치한 전의감(典醫監)을 고친 이름으로 전의원(典醫院)과 혜민서(惠民署)를 합쳐서 삼의원(三醫院)이라고 했다. 전의원은 약재를 공급하거나 의생들의 교육 및 과거를 담당하였다. 혜민서는 1392년 개국과 동시에 설치된 혜민국과 1397년에 설립된 제생원을 1460년(세조6)에 통합한 뒤 1466년에 이름을 이렇게 하여 백성들을 위한 의료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비해 내의원은 본래 왕실의 의료를 전담한 내약방(內藥房)이었던 것을 세종 때 이렇게 이름을 바꾸어서 생겨났다. 내의원에는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부제조(副提調)를 각 1명씩 두었다. 다만 부제조는 승지가 겸직하였다. 아울러 정3품인 정(正) 1인, 종 4품인 첨정(僉正) 1인, 종5품인 판관(判官) 1인, 종6품인 주부(主簿) 1인이 배치되었다. 종7품인 직장(直長)은 3인, 종8품인 봉사(奉事)는 2인, 정9품인 부봉사(副奉事)는 2인, 종9품인 참봉(參奉)은 1인이 배치되었다.
내의원에 근무한 의원들은 철저한 심사를 거쳐 선발한 의원들이기 때문에 남보다 의술이 뛰어난 인물들로 배정되었다.7) “비록 왕실의료 기관이지만 왕실의 질병뿐만 아니라 왕이 아끼는 신하가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는 구료해 주거나 내의원에 소장된 약재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위급할 때는 시약청, 산실청, 호산청 등을 설치하여 위급상황에 대처했으며, 그 밖에 의서습독청(醫書習讀廳), 의서찬집청(醫書撰集廳)을 마련하여 의서를 읽히거나 편찬, 간행을 주도하기도 하였다.”8) 하지만 효종 때 직장 2명을 줄이고 침의(鍼醫)와 의녀(醫女) 22명을 두었다.
조선 초기 내의원의 어의들은 침이나 뜸을 통한 치료와 함께 식료(食療)에 대단한 관심을 두었다. 조선 초기인 세조 4년(1460)에 한문으로 쓰인 『식료찬요(食療纂要)』는 당시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 ?~?)가 기왕에 알려져 있던 중국의 의서들을 참고하여 45가지의 질병에 알맞은 치료법을 정리하여 책을 편찬하였다. 그것을 읽어본 세조는 직접 『식료찬요』라는 책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여기에서 ‘식료’란 음식으로 병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사실 ‘식료’의 방식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유래한다. 고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오미(五味)가 사람의 혀에 직접적인 감각을 줄 뿐만 아니라, 아울러 피부와 육체에도 중요한 조절 작용을 한다고 보았다.9) 오미의 조화가 잘 되지 못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음식의 맛을 불쾌하게 느끼도록 할뿐만 아니라, 동시에 몸에도 좋지 않은 해를 입히게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왕의 건강관리와 질병치료는 보법(補法)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변했다.10) 보법이란 보약을 통해서 인체의 허약한 부분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특히 영조 때에 들어서 평소에도 보약을 복용하면서, 병이 생겼을 때도 보약으로 다스리려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4) 왕런샹(주영하 옮김), 『중국음식문화사』, 서울:민음사, 2010, 110〜111쪽.
5) 『세조실록』 38권, 1466년(세조12) 1월 15일자 기사.
6) 김호, 「조선의 食治 전통과 王室의 食治 음식」, 『朝鮮時代史學報』 45집, 2008, 142쪽.
7) 金重權, 「朝鮮朝 內醫院의 醫書編刊 및 醫學資料室에 관한 硏究」, 『書誌學硏究』第42輯, 2009, 347 쪽.
8) 金重權, 앞의 글 347쪽.
9) 왕런샹(주영하 옮김), 앞의 책 174〜179쪽.
10) 김정선·황상익, 「조선 후기 내의원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의학 경향」, 『醫史學』제16권 제2호(통권 제 31호), 2007,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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