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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으로 바라본 조선 왕실 - 왕의 복식

튼씩이 2022. 5. 19. 12:54

복식으로 바라본 조선 왕실

- 조선 왕실의 옷장을 열다 -


박 가 영  숭의여자대학교 패션디자인과 교수

 


궁중에서 왕에게 올리는 밥을 높여서 수라라고 이르듯이, 왕의 옷을 높여서 의대(衣襨)라고 하였다. 왕 뿐 아니라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의 옷과 장신구, 옷을 만드는 재료, 침구류에 이르기까지 총칭하는 단어가 의대이다. 한편, 법복(法服)은 궁중의례 때 예법에 맞추어 규정대로 착용하는 복식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매일 원하는 옷을 마음대로 골라서 입을 수 없었고, 시간과 장소와 상황, 즉 의례에 따라 각 신분별로 착용해야 할 복식이 정해져 있었다. 자세한 규정은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같은 법전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같은 전례서에 정리되어 있었으며, 이 기본원칙을 바탕으로 선례를 확인하면서 신중하게 착용하였다. 유교적 계급사회인 조선에서 왕과 왕비는 언제 어디서 무슨 옷을 입었는지, 누가 만들고 어떻게 보관했는지, 궁궐 안에서 복식을 착용하는 원칙과 궁궐 밖에서 왕실의 복식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땠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왕의 복식

 

1) 왕의 의례별 복식


조선시대 왕은 수없이 많은 의례를 주관했고, 각 의례마다 착용하도록 정해진 복식이 있었다. 왕의 의례용 법복으로는 면복(冕服), 원유관복(遠遊冠服), 시사복(視事服)을 들 수 있고, 이밖에도 군례나 전쟁에 입는 군사복식으로 군복(軍服), 융복(戎服), 갑주(甲冑)가 있었으며, 연거 시에는 편복(便服)을 입고 국휼을 당하면 상복(喪服), 담복(禫服)을 착용했다.


면복은 최고의 예복으로서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릴 때와 설날 아침과 동지, 책봉식, 혼례식 등 크고 중요한 국가 의례에 착용한 복식이다. 면복은 단순히 하나의 옷이 아니라 규(圭)‧면류관(冕旒冠)‧의(衣)‧상(裳)‧대대(大帶)‧혁대(革帶)‧중단(中單)‧패(佩)‧수(綬)‧폐슬(蔽膝)‧말(襪)‧석(舃)까지 여러 품목을 일습(一襲)으로 모두 갖추었을 때 완성되는 옷차림이었다. 여기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위의 면복 차림에 방심곡령(方心曲領)을 더하였다. 면복의 가장 큰 특징은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상징하는 문양인 장문(章紋)으로 장식했다는 점이다. 장문은 최대 12가지가 있었으며, 황제는 면복에 12가지 장문을 모두 사용하였고 왕은 일(日)‧월(月)‧성신(星辰)을 제외한 9가지 장문으로 장식하였으며 왕세자는 7가지, 왕세손은 5가지로서 사용할 수 있는 문양의 종류가 점차 줄어들었다. 의복에 장문을 나타낼 때에는 복식품목, 색, 수량, 문양표현방식에 이르기까지 음양오행을 철저하게 지켰다. 의(衣)는 위쪽에 입는 상의이므로 양(陽)에 해당하고, 따라서 검은색 비단[玄色繒]으로 만들고 용․산․불․새․종묘의 제기의 5가지 문양을 그림[繪]으로 표현하였다. 상(裳)은 허리에 묶어 입는 하의이므로 음(陰)에 해당하고, 따라서 붉은 색 비단[纁色繒]으로 만들고 바닷말․쌀․도 끼․불의 4가지 문양을 자수[繡]로 표현하였다. 면류관의 앞뒤로 늘어뜨린 구슬 줄로도 신분을 나타내었으니 황제는 앞뒤 각각 12줄씩, 왕은 9줄씩, 왕세자는 8줄씩, 왕세손은 7줄씩 늘어뜨렸다.


원유관복은 면복 다음으로 중요한 복식으로서 왕이 신하들의 하례를 받을 때, 왕비와 왕세자빈을 책봉할 때 착용하였다. 이 역시 면복처럼 십 여 가지 품목을 일습으로 갖추었다. 구성품목은 규‧원유관(遠遊冠)‧의‧상‧대대‧혁대‧중단‧패‧수‧폐슬‧말‧석으로서, 면복과 비교해보면 면류관 대신 원유관을 쓰고, 의의 바탕색이 검정색 대신 붉은색이었으며, 장문과 같은 문양이 없다는 점이 달랐다.


시사복은 평상시 사무를 볼 때 착용하는 복식으로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으며 옥대를 매고 검정색 화(靴)를 신은 차림이다. 조선 전기에는 곤룡포 속에 기본복식인 바지‧저고리 위에 철릭과 답호를 입었고, 후기에는 창의와 직령을 입다가 말기에는 두루마기에 전복을 입었다. 관모를 기준으로 복식의 명칭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에 익선관복(翼善冠服)이라고도 하고 상복(常服)이라고도 한다. 왕실의 상복은 착용자에 따라 명칭이 달라져서 왕은 시사복, 왕세자는 서연복(書筵服), 왕세손은 강서복(講書服)으로 불렸다. 이는 왕과 왕세자와 왕세손의 역할이 다르고 일상의 주요업무가 달랐기 때문이다. 

 

 

2) 복식 착용의 실제사례


한 의례에 한 가지 복식을 착용한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여러 가지 복식을 갈아입는 경우도 있었고, 의례의 내용에 따라 모자의 새깃[羽]을 꽂거나 뽑는 순간도 정해져 있었고 면복을 입을 때 규(圭]를 잡는 시점도 미리 정해져 있었다. 이와 같이 복잡한 예법을 매번 암기할 수는 없었기에 의례를 진행할 때 의식의 절차를 상세히 기록한 의주(儀註)를 사전에 미리 준비하였고, 습의(習儀)라고 하는 예행연습도 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보면 1795년(정조 19) 화성행차를 위해 정조는 원행의 기본복식인 융복, 말을 타고 이동할 때 입을 군복, 화성 향교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면복, 군사훈련 참관을 위한 갑옷과 투구[甲冑], 비가 올 때를 대비한 비옷[雨具]까지 여러 벌의 복식을 준비하였다. 행사 장소에 도착하면 천막을 쳐서 탈의실이자 휴식장소인 막차(幕次)를 만들고 이곳에서 의식의 내용과 의미에 맞추어서 미리 정해진 복식으로 갈아입었다. 원칙적으로는 전례서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과거의 선례를 참고하여 결정한 의주를 따르지만, 경연(經 筵)을 통해 계획을 수정하여 의주와는 다른 복식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화성행차 때 성묘에 참배하는 의례에서 말을 타고 이동할 때에는 의주는 융복을 입도록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군복을 입었고, 화성 행궁의 군문을 들어갈 때에는 의주에 없는 갑주로 갈아 입었으며, 현륭원에서 절하고 향을 올릴 때에도 융복 대신 참포(黲袍)와 오서대(烏犀帶)의 상복(喪服)을 착용하였다.

 


3) 제작과 보관


상의원(尙衣院)은 조선 왕실의 복식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총 책임기관이었다. 고급옷감을 짜는 능라장과 옷을 바느질하는 침선장‧침선비부터 가죽과 모피, 염색, 금박, 신발, 관모 전문가까지 수 백 명의 장인이 상의원에 소속되어 공임을 받으며 교대 근무를 했다. 부족한 물품은 호조(戶曹) 등 관련 관청에 요청하여 지원받거나 새로 제작하였고, 중국에서 수입해야할 직물, 모자, 의복재료 등은 중국에 가는 통역관[上通事]을 통해 무역하여 납품하도록 하였다.


의례행사가 있거나 절일(節日)이 되거나 계절이 바뀌면 상의원에서는 복식을 제작하여 궁궐에 진상하였다. 행사일정이 정해지면 상의원에서는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별로 복식의 재고 조사를 실시하는 동시에 상태도 점검하였다. 가지고 있는 물품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상태가 좋지 못한 복식은 수선을 하거나 다시 염색하였다.


각 분야 최고의 장인들이 정성어린 손길로 완성한 궁중 복식은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왕의 면복 일습을 예로 들어보면, 의복과 여러 부속품들을 커다란 홑보자기 하나에 함께 싸서 면복각(冕服閣)이라는 상자에 담고, 붉은 색 버선과 신발은 작은 홑보자기에 함께 싸서 면복각의 아래층에 담는다. 규는 붉은색 비단으로 만든 집[家]에 넣었고, 평천관은 솜보자기로 싸서 평천관집에 담으며 겨울용 방한모자인 이엄(耳掩)은 별도의 상자[閣]에 담아서 보관했다. 다른 복식들도 마찬가지로 각 품목을 보자기로 싸고 나무로 만든 상자인 각(閣) 이나 붉은색 비단으로 만든 집에 담아서 보관하였다. 보관용구에 있어서도 색상으로 신분을 표시하였다. 왕의 복식을 보관하는 상자나 집은 붉은색 왜주홍칠을 하였고, 왕세자의 것은 검정색 옻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