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왕비의 복식
1) 왕비의 의례별 복식
왕비 역시 각 의례에서 착용하도록 정해진 복식이 있었다. 왕비의 예복으로는 적의(翟衣), 국의(鞠衣), 원삼(圓衫), 당의(唐衣)를 들 수 있다.
적의는 조선 왕실에서 최고 통치자의 적통을 잇는 여인만 착용 가능한 최고의 예복으로서 책봉 받을 때, 조회 때, 존호를 받을 때 착용하였다. 꿩무늬가 특징이어서 적의, 적관처럼 명칭에 꿩 적(翟)이라는 글자가 들어갔으며, 적의 뿐 아니라 하피, 배자, 폐슬에도 꿩무늬[翟紋]를 직조하거나 부금(付金)하였다. 왕의 면복이나 원유관복처럼 규‧수식(首飾)‧적의‧ 상‧하피‧대대‧옥대‧패‧수‧폐슬‧말‧석까지 십 여 가지 품목을 모두 갖추었을 때 완성되었다. 시대에 따라 품목이나 특징이 변화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 명(明)에서 사여받은 상복 제도를 따라서 주취칠적관을 쓰고 대삼, 배자, 하피 등을 입었다가, 조선 후기 영조 때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제도를 정비하여 수식(首飾)이라는 머리모양을 갖추고 대왕대비는 자적색 적의, 왕비는 대홍색 적의, 왕세자빈은 아청색 적의를 입었다. 후에 고종황제 즉위 후에는 옛 명나라 황후의 적의제도를 상고하여 심청색 바탕에 꿩무늬와 작은 꽃무늬를 직조한 적의, 검정색 바탕에 꿩무늬와 구름무늬를 부금한 하피 등을 착용하였다. 신분에 따라 꿩무늬의 배치와 수량이 달라서 황후는 12줄로 나누어 문양을 직조한 12등 적의, 황태자비는 9줄로 나눈 9등 적의를 입었다.
국의는 왕비가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親蠶禮) 행사 때 착용했던 복식으로, 문헌기록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고 유물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형태나 구조는 알 수 없다. 1767년(영조 43) 친잠례에서는 단계별로 옷을 갈아입도록 정하였으니 작헌의에는 예복(禮服)에 수식을, 친잠의에는 상복(常服)을, 조현의에는 적의에 수식을, 수견의에는 예복을 입었다. 물론 세부계획은 왕의 복식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미리 의논하여 의주에 정리해두었다.
원삼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여러 종류의 여자 예복을 흡수하여 대표 예복으로 자리잡았다. 조선후기 예복의 전형적인 구조는 좌우 대칭의 둥근 맞깃을 합임으로 여미고, 옷의 길이는 앞보다 뒤가 길며, 넓고 큰 소매 끝에는 대부분 2가지 색 색동과 흰색 한삼이 달렸다. 여기에 아주 긴 띠[帶]를 가슴의 앞에서 뒤로 둘러매어 늘어뜨렸다. 원삼은 색, 문양,보(補)로 신분을 구별하였으며 이중 색이 가장 눈에 띄는 요소였다. 왕비의 원삼은 홍색, 후궁이나 왕세자빈의 원삼은 자적색, 공주와 옹주의 원삼은 녹색이었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황후는 황색 원삼을 입었다. 왕실의 여인은 아니지만 궁중에서 상궁들도 녹색 원삼을 입었는데, 왕실에서는 금직이나 금박으로 봉황, 길상문자, 포도와 동자, 꽃문양을 장식한 반면 상궁은 아무 장식이 없는 녹원삼을 착용하였다.
당의는 치마 저고리 위에 입었던 간단한 예복으로 왕실에서 평상시에 흔히 입었던 복식이다. 조선 초기의 옆트임이 긴 저고리에서 출발하여 시대가 내려오면서 옆선은 점점 중심 쪽으로 들어오고 도련선은 곡선이 되어 현재의 당의 모습으로 변했다. 초록색, 자적색, 흰색 등으로 만들었고 왕실에서는 금직이나 금박으로 장식하고 가슴, 등, 양 어깨에 보를 달았다. 일년 내내 평상 시 착용하였기에 계절에 따라 겹당의와 홑당의로 구분되었고, 소매 끝에 흰색 거들지를 덧대어 당의가 의례복임을 나타내었다.
2) 내외명부 복식 착용의 법도
왕비는 내명부와 외명부로 이루어진 궁중 여인의 수장으로서, 복식을 통해서 위계질서를 가시화하였다. 첫째, 친잠례나 내연(內宴) 등 여성 중심의 궁중행사에서 착용하는 모든 예복들은 색상, 문양, 재료, 수량 등의 요소들을 총동원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다. 둘째, 궁궐 내에서 착용하는 복식은 계절이 바뀌어 옷을 갈아입을 때 왕비가 갈아입기를 기다린 후 다음날이 되어야 갈아입을 수 있었다. 셋째, 상의원에서 진상 받은 버선은 진솔, 즉 새옷 상태일 때만 착용하고 그 후 다시 신지 않았다. 한 번 신은 버선은 잘 모아두었다가 친척들이나 고위관리, 궁인(宮人)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처럼 규정과 풍속을 통해서 기강을 바로잡고 서열을 되새기도록 하였다.
3) 보관과 포장
조선시대 궁중 복식은 예(禮)를 표상화하는 수단이었기에 신중하고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어떤 상황이나 행사에 무슨 옷을 입고 어떤 머리모양을 하는지 지침서를 만들어서 익히고 수시로 참고하였을 뿐 아니라, 궁녀들은 행사 때마다 필요한 복식의 목록을 적어 각종 궁중ᄇᆞᆯ긔[宮中件記]로 남겼다. 예를 들어 수식이라는 머리모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종류의 장신구가 필요했는데 각 패물을 위해 크기와 내부구조가 다른 맞춤형 상자 백 여 개를 만들었고, 포장용 보자기와 상자에 내용물의 이름과 수량을 적어두었으며, 종이로 이름표를 만들어 가발 위에 해당 위치를 표시해두었다. 패물을 보관하는 상자 하나를 보더라도 패물의 크기에 맞도록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패물을 고정하는 꽂이, 패물의 보석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솜베개, 패물을 포장하는 솜과 종이와 보자기, 상자의 내용물을 알려주는 이름표를 마련하였다. 각각의 패물을 위한 완전맞춤형 보석상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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