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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으로 바라본 조선 왕실 - 조선 왕실의 복식 관련 원칙과 경향

튼씩이 2022. 5. 24. 07:48

1) 왕의 복식을 따르다, 백관종상복(百官從上服)


조선시대 왕의 복식은 항상 문무백관 복식의 기준이 되었다. ‘모든 관리의 복식은 왕의 복식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때 왕의 복식을 따른다는 의미는 왕과 똑같이 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례의 내용과 성격, 인물의 역할, 왕과의 상호관계에 따라 정해진 복식을 입었다. 즉 왕의 복식을 그대로 따라 입는 것이 아니라 왕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에 따라 신하가 입어야할 옷이 정해졌다는 의미이다. 왕과 신하 복식의 관계는 법전인 대전회통(大典 會通)』에 기록되어 있다. 왕이 면복이나 강사포를 입을 때 백관은 조복(朝服)을 입고, 왕이 면복에 방심곡령을 더하면 백관은 조복을 입고 제관(祭官)과 향관(享官)은 제복을 입으며, 왕이 곤룡포나 무양흑원룡포를 입을 때 백관은 흑단령을 입고, 왕이 참포를 입는 경우 백관은 천담복을, 왕이 철릭을 입을 때 백관도 융복을 갖추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면, 왕이 국혼을 치르기 전에 종묘에 고유제(告由祭)라는 제사를 올려 선대 왕들에게 국가의 경사를 아뢰는데, 이때 왕은 혼례복에 해당하는 최고의 예복인 면복을 착용하고 여기에 제사를 올릴 때에는 방심곡령을 더했다. 의례에 참석하는 종친과 문무백관도 자신의 최고 성장인 조복을 착용하였고 제사의 진행을 담당한 제관과 향관은 자신의 역할을 보여주는 제복을 착용하였다. 관리들의 조복과 제복은 색상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 구성품목과 형태가 동일했기 때문에 전체 복식에서의 통일감이 유지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서는 질서와 조화를 통해 예악을 구현하였다.

 


2) 왕비의 복식을 따르다, 순화궁첩초의 기록


조선시대 왕비의 복식 역시 내외명부 복식의 기준이 되었다. 순화궁첩초(順和宮帖草)』는 헌종의 총애를 받았던 경빈 김씨, 즉 순화궁이 궁궐에 들어왔을 때 받았던 궁중 복식 법도의 지침서이다. 기록 중에 ‘위에서 입으신 후를 기다려서 입으니’ 라는 구절이 있다. 왕비 이상의 웃전에서 먼저 입으셔야만 나머지 궁중 여인들이 그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뜻이다. 궁중의 평상 예복인 당의는 여름용 홑당의와 봄‧가을‧겨울용 겹당의가 있어 계절에 따라 갈아입었다. 당의를 갈아입는 시점은 단오와 추석이었는데, 5월 단오 전날 왕비가 여름 당의로 갈아입으면 단오날부터 궁중의 모든 사람이 여름 당의로 갈아입고, 추석 전날 왕비가 겹당의로 갈아입으면 추석날부터 궁중의 모든 사람이 겹당의로 갈아입었다. 따라서 조선의 궁궐 내에서 단오 전날 여름용 홑당의를 입은 여인, 추석 전날 춘추용 겹당의를 입은 여인은 대왕대비, 왕대비, 왕비뿐이었다. 

 

 

3) 조선의 궁중스타일, 궁양(宮樣)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여 궁궐 안의 생활과 물건은 항상 호기심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사대부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궁중의 스타일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사람들은 이를 “宮樣”이라 하였다. 궁양은 글자 그대로 궁중의 특정한 양식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사치함과 동일시되었다. 사람들은 ‘궁중 양식을 따르기 위해서’, ‘궁중을 본받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호사스러운 복식을 입었고, 나라에서 사치 풍조를 막으려고 하면 궁양이라는 핑계를 대곤 하였다. 실제로 궁중 복식은 고급 재료를 사용하였고 금직, 금박, 자수 등으로 민간 복식보다 화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실은 원칙적으로 검소와 절약을 솔선수범하여 만백성에게 본을 보이고자 하였다. 태종대에는 버선까지도 고급 옷감으로 만들어 진상했다는 이유로 상의원의 담당자를 벌주려한 일도 있었고, 세종대에는 왕비 옷의 옷감을 한 등급 낮추도록 명하였다. 선조의 재궁(梓宮)에는 고급 비단옷 보다 평소 착용하던 무명옷과 베옷이 많았고, 중종대에는 당시 유행하던 짙은 초록색을 금지하고자 궁궐 내에서 착용하지 못하게 함은 물론이고 상의원에서의 제작 자체를 금지하여 원천봉쇄 하였다. 이러한 왕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궁궐 밖에서는 궁양은 곧 비싸고 화려한 것으로 치부하여 사치를 경쟁하는 일이 허다했고, 궁양이 유행하면 왕은 신하들의 비판을 면치 못했다.

 

 

4) 유교적 가치관, 절용(節用)


사치와 화려함의 추구는 어느 특정 시기에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수시로 반복되는 사회현상이었다. 대중들은 항상 당시의 유행을 따르다가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서 광수고계 (廣袖高髻) 수준에 이르곤 하였다. 광수고계란 넓은 소매와 높은 가발이라는 뜻으로 궁중에서 시작된 유행과 사치가 대중에게 확산되면서 점차 심해지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사치의 해로움은 천재지변보다 심하므로 왕조의 존속을 위해서는 반드시 근절해야만 했고, 유교사회에서 사치 풍조에 대한 해결책은 왕이 솔선수범하여 절약하고 검소한 삶을 사는 ‘절용’으로 일축되었다. 절용이란 절제하여 사용하는, 다시 말해 아껴 쓰는 것이며 실록에서 600건이 넘는 관련기사를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패션에서 절용을 강조한 사례로는 영조대 상방정례尙方定例』의 편찬을 들 수 있다. 상방이란 상의원의 별명으로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복식과 직물 등을 진상하는 관청이다. 1년 동안 계획된 수량에 맞추어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분이 발생하면 왕의 승인 하에 호조에서 끌어와서 사용하곤 하였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부적절한 거래가 이루어지거나 낭비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를 염려하고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영조가 만든 책이상방정례』이다. 절용을 목적으로 편찬한 책이었기에 구체적인 실천방안들이 정리되어 있다. 첫째, 필요한 물품 목록에서 물품의 수량을 줄이고, 둘째, 상의원에 재고가 있을 경우 호조에서 더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셋째, 연중 계획안과 예산에 잡혀있지 않은 특별수요는 가능한 원래의 예산안 내에서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제작 측면에서의 절용 방안과 함께 보관 측면에서의 실천방안도 더해졌다.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관해서 오래도록 아껴 쓰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왕과 왕비의 복식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보자기부터 집 [家], 상자[函,閣]를 보면 왕실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하고 보관하였는지를 오늘날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실록(實錄)』


의궤(儀軌)』


궁중ᄇᆞᆯ긔[宮中件記]』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혼정례(國婚定例)』


상방정례(尙方定例)』


순화궁첩초(順和宮帖草)』


이민주(2013),(조선의 왕실복식)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박성실․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난사전통복식문화재연구소 편(2016),어진에 옷을 입히다』, 민속원.


박가영(2017), 조선시대 궁중 패션』, 민속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