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궁궐의 역사: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에는 궁궐이 다섯이 있다”고 흔히 말하는데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틀린 말이 다. 왕국이 사라지고 임금도 사라진 오늘날 대한민국 서울에는 궁궐이 있을 수 없다.
예전에 있었다는 뜻이라면 궁궐이 아니라 고궁(古宮)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서울에 고궁이 다섯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고궁이라고 하려면 어느 정도는 궁궐 모양을 갖추어야 할텐데 다섯이 모두 고궁 모양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서울에 있던 궁궐을 다 따지면 다섯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그 다섯 궁궐이 동시에 있었던 적은 없다. 하나만 있던 적도 있고, 많을 때는 넷이 있기도 하였다. 궁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갔다. 이러한 궁궐의 변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이라는 개념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 법궁은 제1의 궁궐, 공식적으로 임금이 의당 임어(臨御)할 궁궐을 가리킨다. 그런데 임금이 궁궐 하나만으로 오랜 기간 활동하기는 어려웠다. 임금이 기거하는 건물에 화재가 나거나, 수리를 해야 하거나, 질병이 번지거나, 괴변이 일어나는 등 더 이상 기거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같은 궁궐의 다른 건물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럴 만한 다른 건물이 마땅하지 않을 경우도 있었고, 그럴 때는 다른 궁궐로 이어(移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제2의 궁궐을 이궁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에서는 거의 늘 법궁과 이궁 두 궁궐을 유지하며 임금들이 이어 환어(還御)하며 생활하였다.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은 경복궁이었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 9월에 완공되어, 그해 12월에 태조를 비롯한 왕실이 그곳으로 입어(入御)하였다. 그 기간은 새 왕조 조선의 기틀을 잡기 위한 기초 작업이 진행된 시기였고, 경복궁 입어는 그 작업이 일단락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경복궁은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는 당연히 법궁(法宮)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왕조 제2의 궁궐 창덕궁은 1404년(태종 4) 10월 태종이 영건을 결정하여 1405(태종 5) 10월 완공되었다. 창덕궁은 법궁 경복궁에 대하여 이궁으로 인식되었다.
창경궁은 1482년(성종 13년) 12월에 수강궁(壽康宮)을 수리하라고 명을 내리면서 영건이 시작되어 1484년(성종 15년) 9월에 영건 공사가 일단 끝났다. 창경궁은 독립된 궁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창덕궁에 붙어 하나의 궁역(宮域)을 이루면서 창덕궁에 부족한 주거 생활 기능을 보완하는 구실을 하였다. 그 두 궁궐은 하나로 인식되기도 하여 동궐(東闕)로 불렸다. 성종 대에 창경궁이 조영됨으로써 경복궁이 법궁이 되고 동궐, 곧 창덕궁 및 창경궁이 이궁이 되는 법궁─이궁 양궐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 체제는 이후 임진왜란까지 약 100여 년간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진으로 쳐들어오자 4월 30일 선조를 비롯하여 피난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을 떠났다.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여 종묘와 궁궐, 관아를 비롯하여 주요 건물들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선조는 1593년(선조 26) 10월 서울로 돌아왔으나 임어할 궁궐이 없었다. 정릉동에 남아 있던 성종의 형인 고(故)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과 그 부근의 종친 및 고위 관원의 집들을 임시 거처―행궁으로 삼았다. 선조는 종묘와 궁궐을 다시 지으려 착수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성사하지 못하고 1608년(선조 41) 정릉동 행궁에서 승하하였다.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5월 말에는 종묘가 완공되었고, 1609년 말에는 창덕궁이 거의 완공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가기를 꺼리다가 결국 1615년(광해군 7년) 4월에 가서야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인접한 창경궁을 새로 지어 창덕궁과 함께 이용하였다. 광해군은 이 두 궁궐 외에도 재위 기간 내내 궁궐 영건에 집착하였다.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仁慶宮)이라는 궁궐을 지었고, 그 공사가 진행 중에 또 돈의문 안쪽에 경덕궁(慶德宮)을 짓는 공사를 벌였다. 이 두 궁궐을 거의 마무리하였으나 임어하지 못하고 1623년(광해군 15) 왕위에서 쫓겨났다.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인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을 보수하는 데 광해군 때에 영건한 인경궁의 자재를 헐어다 사용하였다. 그 결과 인경궁은 없어졌고 경덕궁―영조 연간에 이름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만이 남아 이궁으로 쓰였다. 이로써 1647년(인조 25년) 이후에는 경복궁은 빈 궁궐터로 남아 있고 창덕궁 및 창경궁―동궐(東闕)이 법궁이 되고 서궐(西闕), 곧 경덕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양궐 체제가 정립되어 이후 조선후기 내내 유지되었다.
고종이 즉위한 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던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명으로 1865년(고종 2년) 4월에 경복궁 중건이 발의되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경복궁 중건 공사는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주도하여 진척되었고, 1868년(고종 5년) 7월 고종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다. 중건된 경복궁은 과거의 법궁 지위를 되찾게 되었고, 동궐이 이궁이 되는 임진왜란 이전의 양궐체제를 회복하였다. 서궐─경희궁은 그 전각들의 목재 석재 등이 경복궁 중건하는 데 쓰이면서 궁궐로서 면모와 기능을 상실하였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이어 환어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896년(고종 33) 2월 11일에는 아관파천(俄館播遷)―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고종은 그곳과 인접한 옛 경운궁 터에 궁궐을 짓고 1897년(고종 34) 2월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거기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지었다. 1907년 순종에게 황제위를 억지로 넘겨줄 때까지 10년간 경운궁은 대한제국 정치 행정 외교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1907년 황제가 된 순종은 그 역할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하여 일본의 뜻대로 움직이는 처지였다. 순종은 즉위한 지 넉 달이 안되어 창덕궁으로 옮겨 갔다. 거기서 연호가 융희(隆熙)인 3년의 짧은 재위기간 끝에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 왕조가 망하고 임금이 사라진 뒤 궁궐도 의미도 기능도 잃었다. 일제는 궁궐 건물들을 민간에 매각하기도 하는 등 의도적으로 훼철하였다. 경복궁에서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50일간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 共進會)라는 식민통치를 미화 선정하는 박람회를 열었다. 그것이 끝나자마자 그 제1호관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하였다. 광화문은 경복궁 동쪽 궁성의 북쪽편으로 옮겨 버렸다.
1917년 순종과 구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기거하던 창덕궁 내전 일대에 큰 화재가 났다. 총독부는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다 희정당을, 대조전을 헐어다 교태전을 다시 지었다. 내전 일대가 이렇게 변질된 것만이 아니라 나머지 구역의 건물들도 상당 부분 헐려 없어졌다. 창경궁은 식민지가 되기 전에 이미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 표본실 등 구경거리로 채워지기 시작하여 관광지가 되어갔고, 1911년에는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뀌었다. 경운궁은 고종이 살아있는 때까지는 비교적 파괴와 변형이 적었으나 고종 사후에는 역시 공원이 되어 화훼 전시회 등이 열리는 공원이 되었다. 경희궁은 외전과 내전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 있었으나 일본인 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남아 있던 건물들도 대부분 옮겨져 나갔고 궁궐의 면모는 완전히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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