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지화
조선 궁궐의 전각은 기둥으로 칸을 나누고, 기둥 사이를 벽과 창호로 메워 방[室]을 만드는 가변적 공간이다. 방을 만들 때 벽과 천장에 문틀을 고정시킨 다음 칸막이처럼 다는 문을 장지[障子]라고 한다.14) 장지문은 설치, 분리가 가능하긴 하나 병풍과 달리 벽체에 고정되어 이동이 어렵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일월오봉도 창호>와 같이 4조가 한 세트로 미닫이 형태를 띤 창호 장지문은 아마도 국왕의 침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침전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아홉 칸으로 나뉘어 정중앙 부분을 왕이나 왕비의 침실로 삼고, 그 주변 여덟 칸에서는 침전에서 일을 하는 나인들이 잠을 청했다. 아홉 칸의 정중앙부에 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4면에 세워질 칸막이가 필요하다. 그 때문인지 현존하는 장지문은 네 짝이 한 조를 이루고, 네 조가 모여 하나의 일월오봉도, 십장생도를 완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국립고궁박물관의 〈십장생도 창호〉 일부 문짝의 상단에 ‘남(南), 서(西), 동(東)’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러한 흔적은 각 조가 설치된 방위를 표시해놓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14) 박윤희, 「궁궐 전각의 장식그림: 창호그림과 부벽화」, 『궁궐의 장식 그림』, 국립고궁박물관, 2009, pp.99-108.
(3) 부벽화
그림을 벽체에 직접 그리지 않고 종이나 비단에 그림을 그려 완성한 다음 그것을 벽체에 부착하는 것을 부벽화라 한다. 19세기까지도 감계가 될 만한 그림이나 글이 있으면 전각 내부 벽체나 기둥, 창호에 부착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대청 상단 벽 전체를 대규모 벽화로 장식하는 것은 근대기에 나타난 새로운 방식이었다. 근대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대규모 부벽화는 1920년대 대대적으로 재건된 창덕궁의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에서 발견된다.15) 화면 상단 윗벽을 가득 채운 부벽화는 입식 생활로 변화된 건축 구조 속에서 더 적합한 새로운 매체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20년 재건된 희정당에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4-1933)이 그린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부벽화 형식으로 설치되었다. 당시 희정당은 접견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금강산 실경산수화라는 주제는 당시 금강산 관광개발 정책과 연결시켜 보는 견해와 금강산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견해로 나뉠 수 있다. 대조전의 대청 동편과 서편에는 각각 〈봉황도〉와 〈백학도〉 부벽화가 부착되었다. 경훈각의 동쪽 벽은 노수현이 그린 <조일선관도>가, 서쪽 벽에는 김은호의 고사인물도인 <삼선관파도>가 그려졌다. 이들은 각각 왕비의 휴식공간과 국왕의 침전으로서 전통적인 장수와 복락을 상징하는 주제가 선택되었다.
15) 강민기, 「궁궐을 장식한 벽화」, pp.278-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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