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궁중장식화, 어디에 놓였을까 – 공간
궁궐은 관료집단이 왕과 함께 국가를 경영하는 정치적, 공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왕실 가족이 일상생활을 영위해나가는 사적 공간이기도 했다. 궁궐은 크게 외전(外殿)영역과 내전(內殿) 영역으로 나뉘는데, 외전 영역은 의례가 거행되며 국가 행사가 이루어지는 정전(正殿)과 편전(便殿)을, 내전 영역은 침전(寢殿)을 지칭한다.16)
16) 궁궐 공간에 따른 궁중 회화의 장엄 분석은 다음 참조. 홍선표, 「조선시대 궁궐의 그림 치장」, 『동아시아의 궁중미술』(CAS, 2013), pp.208-227.
1) 정전
정전은 왕의 즉위식, 가례(嘉禮), 조하례(朝賀禮), 외국 사신 접견과 같은 국가와 왕실의 주요 의식을 거행하는 중심 전각으로, 국가 권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엄격하게 격식을 갖추었다. 정전은 지면보다 건물을 높게 하여 전각의 위용을 돋보이게 하는 시각적 기능을 하는 월대(月臺) 위에 지어졌다. 신하들은 의례가 있을 때, 두 단의 기단을 오르고 월대를 지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정전 대청의 중앙 북벽 가까이에 또 하나의 건축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정전의 어좌는 높이 단을 세운 어탑(御榻)과 천장을 화려하게 장식한 당가(唐家)의 구조물 위에 임금의 용상(龍床)을 울려둔 것인데 용상 뒤에는 목조병풍인 곡병(曲屛)이 놓이고, 그 뒤에 오봉도를 두었다. 어탑, 당가, 용상, 곡병, 오봉도는 어좌를 이루는 하나의 셋트로 설치되었다. 이 곳 정전에 설치된 오봉도는 접히는 첩병(帖屛)이 아니라 거대한 규모의 한 폭짜리 장자(障子)로 제작되었다. 주로 어탑의 크기에 따라서 오봉도의 가로 폭이 결정되는데 대부분이 가로 세로 모두 4-5m에 달하는 큰 크기였다.
일월오봉도는 적어도 16세기경부터는 임금의 어좌 뒤에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좌 뒤에 어떤 병풍이 놓였을까. 고려시대에는 도끼를 수놓은 ‘부의(斧扆)’나 용을 그린 ‘용의(龍扆)’를 놓았으며 때에 따라 왕이 새겨야할 문장을 쓴 서예 병풍이 놓였다. ‘부의’는 『예기』와 『시경』에도 천자의 자리에 놓이는 병풍으로 규정되어 있어 중국 고대부터 ‘부의’가 군주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금의 장례 의식과 제사 의식에서 여전히 임금의 시신과 신위 뒤에 ‘부의’ 병풍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오례의』에는 임금의 병환이 위독해지면 빈소에 ‘보의’를 설치한다고 하였고, 종묘의 신위 뒤에는 자리마다 ‘보의’를 설치한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보의’ 도상은 『국조오례의서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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