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한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세상 돌아가는 속내를 조금씩 알게 되고 나름대로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속내를 '아는 것'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삶의 보배로운 등불이다. '앎'과 '깨달음', 이 두 가지 가운데서도 삶의 길을 멀리 까지 올바르게 비춰 주는 밝은 등불은 말할 나위도 없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어쩐 일인지 앎에는 굶주리고 목말라하면서도 깨달음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 듯하다. 하기야 신문이다, 라디오다, 텔레비전이다, 인터넷이다, 하면서 눈만 뜨면 쏟아지는 온갖 소식이 끊이지 않으니, 그것을 알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다. 어느 겨를에 깨달음까지 걱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깨달음에 마음을 쓰지 않고 앎에만 매달리면 삶은 뜬구름같이 가벼워지고 말 것이다. 알찬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나 알찬 세상을 꿈꾸는 동아리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깨닫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 가는 듯하다. 그것이 삶의 참된 등불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 온갖 것을 다 알면서 정작 가장 깊이 알아야 할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깨닫다'라는 낱말의 뜻부터 새삼스럽지만 되짚어 보고 싶어진다.
1) ① 슬기가 트이어 환하게 알다. ② 느끼거나 알아차리다.
2) ① (모르고 있던 사물 현상의 본질이나 이치 같은 것을) 똑바로 알게 되다. ② 느끼거나 알아차리다.
3) ① 사물이나 본질이나 이치 따위를 생각하거나 궁리하여 알게 되다. ② 감각 따위를 느끼거나 알게 되다.
보다시피 국어사전들이 한결같이 '깨닫다'를 '알다' 또는 '알아 차리다' 또는 '알게 되다'라고 풀이해 놓았다. '알다'와 '알아차리다'는 스스로 하는 이른바 능동이고, '알게 되다'는 남이 해 주는 이른바 피동이라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알다'와 '알아차리다'는 그 또렷하기와 깊이에서 조금씩 서로 다르지만, 이들은 어느 것이나 '알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다. 게다가 '깨닫다'를 '느끼다'라고까지 해 놓았으니, 국어사전들의 풀이대로라면 '깨닫다'는 '알다'와 '느끼다'에 싸잡혀 들어가고 자취를 감추는 수밖에 없다. 국어사전들이 나서서 '깨닫다'를 아예 뭉개고 죽여서 없애 버리는 셈이다. 이러니까 우리 삶 안에 '깨달음'이 자취를 감추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깨닫다'는 '깨다'와 '닫다'가 어우러진 낱말이다. 여기서 '깨다'는 잠에서 깨어나고, 꿈에서 깨어나고, 술에서 깨어나는 그것을 뜻한다. 잠과 꿈과 술이란,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현실에 눈을 감거나 마음이 떠난 자리를 말한다. 거기서 깨어난다는 것은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현실에 다시 눈을 뜨고 건너오는 노릇이다. 다시 말하면 '깨다'라는 것은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술에 취한 듯이 흐리고 멍청하던 삶에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맑고 또렷한 본살의 삶으로 건너오는 노릇을 뜻한다.
그리고 '닫다'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간다는 뜻이다. 가야 할 곳,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힘껏 내달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깨닫다'는 흐리고 멍청하던 삶에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맑고 또렷한 본살의 삶으로 건너와서(깨다) 곧장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내달린다(닫다)는 뜻이다.
보다시피 '깨닫다'는 이만큼 '알다'와는 다른 것이다. 많이 알고 깊이 알다 보면 깨닫는 데까지 이르리라는 생각들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크게 깨달은 인류의 스승들이 말과 삶으로 앎과 깨달음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수없이 가르쳤다. '알다'는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맛보고, 코로 맡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겪으며 키울 수 있다. 한마디로 부지런히 배워서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다'에는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그러나 '깨닫다'는 부지런히 배운다고 키워지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을 얻는 길은 오로지 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깨끗하게 비워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노릇뿐이라고 한다. 변덕스럽게 줄곧 날뛰는 '느낌'도 눌러 앉히고, 쉴 새 없이 허둥대며 헤집으려고 드는 '생각'도 잠재우고, 불쑥불쑥 고개 들고 일어서는 '뜻'도 잘라 버리고, 그런 뒤에 그것들이 가라앉아 거울같이 고요해진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깨달음을 만난다고 한다. 그러면 여느 때에는 아예 있는 체도 하지 않던 '얼'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고 번개처럼 번뜩이는 빛을 비추는 것이다. 이처럼 얼에서 비추는 빛을 알아볼 수 있을 때에야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깨달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텔레비전에만 빠져(그림 이무성 작가)
그러나 깨달음이란 그 속살이 너무도 깊고 넓어서 온통 세상을 꿰뚫어 보는 거룩하고 참된 것에서부터 한갓 먼지 속에 허덕이며 부대끼는 사람의 실낱같은 것까지 헤아릴 길 없이 갖가지다. 허덕이며 부대끼는 가운데서도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는 노릇을 버리지 않을 수만 있으면 누구나 실낱같은 불빛이나마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뿌리 깊은 종교에 믿음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 불빛을 만나려고 기도다. 참선이다. 명상이다. 관상이다 하면서 제 마음을 들여다보기에 겨를이 없는 것이다.
참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걸음들이 있겠지만, 우리말에는 그런 걸음을 나타내는 낱말이 두 가지만 있다. '깨치다'와 '깨우치다'가 그것이다. '깨치다'는 '깨다'와 '치다'가 어우러진 낱말인데, 여기서 '치다'는 '종을 치다, 북을 치다와 같이 쓰이는 그것으로, ‘깨다’에 힘을 보태는 도움가지다.
그러니까 ‘깨치다’는 ‘깨다’에 ‘치다’를 보태기는 했으나 ‘깨닫다’에서 ‘닫다’가 모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달려가는 노릇이 빠진 것으로, 그만큼 ‘깨닫다’에 멀리 미치지 못하는 걸음이다. ‘깨우치다’는 ‘깨치다’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걸음이다. 왜냐하면 ‘깨치다’는 스스로 깨어나는 것(능동)이지만, ‘깨우치다’는 다른 힘의 도움으로 ‘깨어나는 것(피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깨우치다'나 '깨치다'는 '알다'와는 아주 다른 뜻을 지닌 낱말로, '깨어나는 것'이라는 뜻에서 '깨닫다'와 같은 겨레다. 그러므로 '깨우침'을 쌓아 가면 언젠가는 '깨침'에 이르고, '깨침'을 거듭 쌓다 보면 어느 날 느닷없이 '깨달음'을 얻는 때가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깨우침'과 '깨침'과 '깨달음'은 사람의 삶을 가볍지 않도록 알맹이를 채우는 값진 노릇이고, 삶의 값어치를 끌어올리는 거룩한 지렛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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