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암반온도가 200도, 터널공사에 강제동원 조선인

튼씩이 2024. 12. 7. 21:15

지난번에는 조선인들이 혹독한 노동을 한 구로베댐을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조선인들이 일했던 구로베댐 공사의 노동환경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아보겠다.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구로베댐(구로4댐, 1958~1963)은 구로3댐(1936~1940)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구로3댐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중국 대륙으로 전선을 확대하게 되면서 군수품 생산을 위한 전력이 시급했기 때문에 추진되었다. 낙차를 이용한 수력발전소기 때문에 게야키다이라(欅平)에서 센닝다니(仙人谷)까지 약 6km의 수로터널과 궤도터널을 뚫어야 했다.

 

그 가운데 아조하라다니(阿曾原谷)에서 센닝다니(仙人谷)까지 742m 구간은 암반 온도 최고 200도가 넘는 고열터널이고, 유황 냄새가 구토를 유발하고, 온천수가 분출해서 화상을 입기 때문에 인간이 들어가기조차 어려운 공간인데, 그런 가장 위험한 곳은 대부분 조선인이 일했다.

 

▲ 구로3댐 건설터와 수로주변 약도. 지도 안 분홍색 부분이 고열암반 공사 지역이다.

 

구로3댐의 공사는 다른 공사에 견줘 극한의 노동환경이었다. 우선 험준한 산속으로 공사 장비와 자재를 가져가기 위해 벼랑 중턱에 암벽을 60cm 정도 도려내거나 몇 개의 통나무를 벼랑에 이어 붙여서 수평보도를 만들었다. 이 수평보도에 짐꾼은 50~100kg의 짐을 지고 가다가 낙석에 맞거나 발이 미끄러져서 수백 미터 계곡 아래로 떨어진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나도 구출할 수 없고 주검을 찾을 수 없는 때도 있다. 한 번 떨어지면 살 수 없어서 ‘구로베 협곡에서는 부상자가 없다’라고 했다.

 

▲ 벼랑을 파서 만든 수평보도를 가는 전원개발 조사단 <2019 구로베댐 50주년 기념특별 부스, 黒部川第三発電所建設記録(관서전력 <구로베를 열다>) 유튜브 갈무리

 

한편, 구로3댐 공사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사람이 들어서기에 어려울 정도로 뜨겁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고열터널의 암반 온도에 대해 기록마다 차이를 보인다.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의 기록소설 《고열터널(高熱隧道)》(1967년)에서는 암반 최고 온도를 166도라고 했다. 그런데 구로4댐 공사과정을 소설로 다룬 기모토 쇼지(木本正次)가 《구로베의 태양(黒部の太陽)》(1964)에서 구로3 댐에 대해 말할 때는 ’140도까지 쟀고 그 이상은 잴 수 없었다’라고 했으며, 《구로베를 열다》에서는 최고 180도, 요모기자와 사쿠지로(蓬沢作次郎)는 《고향산천에 살다》(1991)에서 “1m 50cm의 구멍을 파 온도계를 5분간 넣었을 뿐인데도 갱내의 암반 온도가 200도 이상이나 상승했다.”라고 했다. (고노가와 준코외,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글로벌콘텐츠, 2023. 71쪽. 재인용)

 

이러한 증언으로 보아 암반 온도는 최고 180~200도 이상인데, ‘기록소설’로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요시무라 아키라의 《고열터널》에서는 그보다 한참 낮은 166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소설 내용 가운데 사실과 다른 점들을 지적하는 논문도 있지만, 이 소설의 인기로 인해 그 주장이 실제 구로3 공사의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터널 작업은 2명이 착암기로 1m 깊이의 구멍 24개를 12시간 걸려 뚫는다. 그 구멍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2~3개씩 장전하면 화약 담당이 와서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그렇게 발파되면 광차(도롯코)가 와서 무너져 내린 흙, 돌덩이를 싣고 나간다. 암반 온도가 95도일 때 갱안 온도는 50도라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화상 입을 온도기 때문에 20분씩 교대로 작업했다. 암반 온도 120도일 때 얼굴 근처의 온도는 65도라서 화상을 입게 되는 열기다. 머리 위로는 뜨거운 물이 떨어져서 온몸에 화상이 생긴다. 이렇게 해서 암반 온도가 200도까지 올라갔다.

 

“섭씨 162도 암반은 이틀 뒤 155도로 조금 떨어졌지만, 그와 함께 상승한 갱 안 온도는 인부들의 열에 대한 인내의 한계점이기도 한 것 같다. 갱 안에서 딱 얼굴에 해당하는 높이의 온도가 70도 가까이 되고 물을 뿌려도 전신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열기에 휩싸인다. 인부들은 주저앉듯이 낮게 있으려 했다. 그래도 20분 동안 절단면에 머무르는 건 그들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고열터널》, 200~201쪽)

 

그리고 암반을 뚫는 인부 2명에게 10m 뒤에서 호스로 물을 뿌려주고 그 2명 뒤에서 또 2명이 앞사람에게 물을 뿌려줬다. “갱내는 60도가 넘는 더위입니다. 굴을 뚫는 광부에게 다른 광부가 붙어서 (호스)물을 뿌려주고 그 사람에게 또 뒤에서 물을 뿌려주는 겁니다. 그래도 갱내에는 몇 분간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구로베의 태양》, 134쪽)

 

▲ 착암기를 사용하는 조선인 노동자, <2019 구로베댐 50주년 기념특별 부스, 黒部川第三発電所建設記録(관서전력 <구로베를 열다>) 유튜브 갈무리

 

갱 안의 뜨거운 열기뿐 아니라 또 고통스러운 것은, 몸을 식히려고 뿌린 물이 갱내에 차올라서 허리까지 오기에 하반신을 뜨거운 물(40~60도)에 담그고 일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반신이 검붉게 충혈되고 피부는 흐무러져서 껍질이 벗겨지기 쉽게 되었다.”(《고열터널》, 195쪽)라고 묘사하고 있다.

 

아조하라(阿曾原) 현장식당 감독의 아들 박경호씨는 “몸에 끼얹은 물이 뜨거워지면서 밑으로 흘렀는데 그 물에 달걀을 담가두면 10분 만에 익을 정도였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현지인들은 “갱 내부는 10m 앞도 보이지 않았고 유황 냄새와 열기, 수증기로 숨이 막혀서 들어갈 수 없었다.”(《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82~83쪽)라고 증언했다.

 

《구로베의 태양》에서는 구로3댐의 공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털이 곤두서는 지옥이었어요.” (120쪽)

“아무튼 ‘성전목적 완수를 위해’라는 것이 표어였죠. 전력(電力)은 전력(戰力) 증강의 기초라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게으름 피우거나 하는 자는 비국민이라는 겁니다. 백몇십 도나 되는 고열터널의 암반을, 바로 자연 폭발해 버리는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노동자들은 자폭에 떨면서 파 나아갔던 겁니다. (가운데 줄임) 노동 기준법도 아무것도 없었고, 그건 정말 참혹한 공사였어요.”(《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128쪽)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고열 속에서 혹독하게 노동한 인부의 몸 상태를, 《고열터널》에서 주인공 후지히라(藤平)는 “몸은 열에 침범당해서 지방분을 잃고 뼈와 가죽처럼 완전히 말랐다. 온몸에 화상 자국이 있었다.”(197쪽)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생명체가 들어갈 수 없는 극한의 고열터널 속으로, 일본의 침략전쟁 준비를 위해 조선인들이 들어갔다. 왜 그 터널 안에 일본인들 대신 조선인들이 들어가서 일해야만 했던 것일까? 조선인들이 살기 위해서 죽음의 터널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진실을 다음 기사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계속해서 “3. 고열 터널 속 조선인들의 뼈와 살을 갈아 넣어”로 이어집니다.

 

 

 

[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