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토목청부업자의 부당 이익을 중심으로-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청부업자를 축으로 한 식민지 경제 발전의 보이지 않는 뒷모습과 그로 인해 조선인들이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던 인과관계를 풀어나간다.
출판사 리뷰
철도 등이 건설되고 근대적 법제가 도입되었음에도 왜 당시 조선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 지배가 경제적으로는 조선에 도움이 되었으며 조선 빈곤의 책임을 전통 사회로 돌린다(『반일종족주의』). 그러나 저자는 그 반례로 재정 분야의 정치권력 개입 사례인 철도 및 수리조합사업에 주목한다. 일본인 토목청부업자들은 재정을 들여 조선 경제의 인프라를 확장시킨다는 총독부와 유착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고 경인.경부철도 공사에서 보듯 조선인 청부업자들을 배제시켜 나갔다. 저자는 총독부 통계자료와 칙령은 물론, 당시 토목건축업협회 잡지의 실태 조사를 샅샅이 훑어 논지를 입증해 나간다. 이때 일제와 일본인 지주의 이익구조를 꿰뚫는 경제학자의 예리함이 돋보인다. 담합사건을 유죄로 하면서 정무통감 통첩의 형태로 지명경쟁입찰을 도입, 청부업자를 구제하는 ‘악의 시스템’을 고발하는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결국 조선으로 투자된 막대한 자금의 상당 부분은 일본인 청부업자와 지주의 손아귀에 들어가 조선인들은 가난에 허덕였던 것이다.
허수열 교수도 지적한 바(2017) 강점기 통계 문서들은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본인이 1945년에 작성한 표를 들어 강제징용 때 조선인 탄광부의 임금이 상당히 높았다고 주장한다(『반일종족주의』). 이에 저자는 통계 자료가 미처 제시하지 못하는 정황이나 데이터의 행간을 읽음으로써 식민지 경제의 민낯을 세세히 그려낸다.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을 추정하면서 그 실태와 조선총독부 통계 자료 사이의 간극을 찾아내고, 체험담, 수기나 신문 보도 등을 근거로 일본인 청부업자 편에서 이루어진 조사의 한계를 밝히는 것이다. 임금 미지급과 그로 말미암은 저임금의 유지는 ‘보이지 않는’ 착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료 수치상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국가권력의 간섭.폭력이나 일본인끼리의 연대감 등은, 곧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언급하는 ‘일상의 자발적 거래’까지도 방해하는 장애물이자 ‘이중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계량 분석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통계의 함정과 일상 거래의 경우의 수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정연태 교수가 지적(2011)한 ‘식민지 수탈론의 연구방법상의 낙후성이나 실증상의 한계’를 극복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근대화론자들의 비판을 받아왔던 ‘수탈’이라는 개념 대신 정치권력에 의한 경제 분야의 부당 관여, 부당 이익, 부당한 방치, 부작위 등 구조적 폭력을 직시하자고 제안한다. 제4장에 언급한 금융 분야에 대한 사례가 더해지고 조선 후기와 해방 후 경제 조사가 보강된다면, 앞으로의 저자 연구는 근대화론의 맹점을 효과적으로 타파하는 정론正論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시기 경제 연구의 신개척이 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기본적인 목적은 크게 군사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군사적인 목적으로는 조선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방파제로서의 역할, 더 나아가서는 또한 중국 대륙으로 군사적 진출을 하기 위한 병참기지 역할을 맡게 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목적은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의 식량 공급지, 원료 공급지, 상품 시장으로서 일본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와 동시에 조선 땅에 살고 있는 일본인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군사적인 목적과 경제적인 목적에 적합한 토목공사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군사적인 목적에서 가장 필요한 토목건축 정책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잇는 철도이다. 그래서 러일전쟁 시에 경부철도.경의철도 부설을 서두른 것이다. 병참기지로서 역할을 하려면 그 땅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발전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를 위한 인프라 정비가 전제 조건이 된다.
경제 목적은 조선을 식량 공급지, 원료 공급지 상품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토목공사는 시행하지만 공업의 발전은 억제하였다.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토목공사를 시행한다고 해도, 이는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에게 건축사업을 통해서 이익을 주는 것이다. 즉 조선총독부가 발주하는 공사는 조선인 청부업자에게는 수주시키지 않고 일본인 청부업자에게 수주시켰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목적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며,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조선을 발전을 위해서 토목사업을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114∼115쪽
기술주임제도는 조선인 청부업자를 합리적인 이유로 배제하기 위해서 창설되었다고 여겨진다. 만약 그 밖의 이유로 만들어졌다면 토목건축청부업이 발달해 있던 일본 내지에서 먼저 도입 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끝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조선에만 도입되었다면 조선에서만 실시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인 청부업자를 배제시키려는 의도 말고는 생각할 수 없다. - 123쪽 -
1898년부터 1906년까지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으로 근무하고 대만 통치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고토 신페이의 말을 소개한 부분이다.
처음에 만주.시베리아.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이 70만이라고 들었는데, 요즘에는 2백만이 되었다고 하여 실로 놀랐다. 이 조선인은 조선의 정치가 좋지 않아서 이주했다. 유사시에는 일본의 조선 통치에 반항할 것이다. (중략) 나는 대만에서 7백만 엔의 세입을 1억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모두 산업에 사용했다. 그래서 오늘의 대만이 있는 것이다. 대부분 조선을 비생산적으로만 이용하고 산업자금에 많이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선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방침은 도저히 안 된다.
대만과 달리 조선은 산업에 자금을 많이 투자하지 않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 163∼164쪽 -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인프라를 정비한 것은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에 다소간 감사해야 한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지금 어떤 건설회사가 도로를 정비하거나 철도 건설공사를 해도 우리는 특별히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 회사가 당연히 공사를 통해 충분한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제하 식민지 시대의 인프라 정비에 대해서 반론하기 어렵다면 이는 이 부분이 너무나도 방치되어 왔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토목청부업자의 이익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는 부분일 것이다. - 179쪽 -
임금 면에서 비교해 보면, 2018년 한국의 법정 최저 임금 월 157만 3,770원은 1933년의 약 153원(152.86원)에 해당한다. 그때 1인당 한 달에 10원 이하를 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현재 최저 임금의 6.5퍼센트 이하, 즉 10만 2,955원에 미치지 못하는 액수이다. 조선 농촌의 결제 상태가 얼마나 궁핍한 수준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 244쪽 -
수리조합사업은 쌀 생산량을 늘려 이익을 내기 위한 사업이라기보다는 쌀의 증산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조선의 농민을 납득시켜 수리조합비로 공사비를 부담시키고자 한 수단이었으며, 실제로는 오히려 토목공사로 이익을 내려고 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일본인 청부업자가 직접 토지를 보유하고 수리조합장이 되어 수리조합사업을 추진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또한 일본인 청부업자가 일본인 지주와 유착하여 이익을 반반씩 나누는 형태로 수리 사업을 추진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 258쪽 -
일본인이 수리조합을 이용해서 조선인이 부담한 수리조합비에서 이익을 챙기는 구조가 확인된다. 수리조합비로부터 얻은 일본인 토목청부업자의 이익이 일본인 지주에게도 분배되고, 그것과는 별도로 조합 직원의 급여나 대행기관 수수료의 상당 부분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 결국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하며 조선 재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조선에서 이익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자 농민으로부터 세금 이외에도 강제집행이 가능한 수리조합비를 부과하여 자금을 과도하게 모아 일본 토목건축청부업자와 일본인 지주, 수리조합에 근무하는 일본인 등에게 부당한 이익을 주는 시스템으로 작용한 것이 수리조합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금의 흐름을 거시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조선인 지주의 자본이 일본인 지주.청부업자 및 그 밖의 일본인에게 대량으로 유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262∼263쪽 -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하는 논문 가운데는 인구가 아주 적었던 일본인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을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선인에게도 경제적인 이익이 배분되었다는 내용이 많다. 또한 당시 조선인이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반밖에 받을 수 없었다는 자료를 읽으면서도, 그래도 50퍼센트 정도는 받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 우편저금액의 차이에 압도되어 버렸다. 일본인의 저금은 실제로 조선인의 245배에 달했던 것이다. 일본인 한 사람이 조선인 245명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1백 명 정도의 상당히 우수한 일본인만이 와 있었다고 하면 말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이미 4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조선에 와 있었다. 게다가 일본에서 상당히 가난했던 일본인이 온 경우도 많았음에도 그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 압도적 차이가 수탈이나 착취, 부당한 이익 확보 없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인가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 270쪽 -
만약 일제가 진정한 의미로 조선을 발전시키겠다고 했다면, 메이지 시대에 일본 정부가 많은 관영 공장을 건설하여 민간에 불하한 것처럼 조선총독부의 예산으로 공장을 지어 민간에 불하했겠지만, 그러한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공업을 발전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조선 경제를 위해 진력했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인프라 정비였기 때문에, 인프라 정비 즉 토목공사를 편중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교통비나 전기요금 등을 일본보다 이상하리만치 비싸게 설정하여 공업 발전을 억제하였다고도 생각된다.
1930년대 만주국이 만들어지며 새로운 시장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많은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안의 공장과 경합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였다. - 272쪽 -
융자할 때 일본인에게는 이율이 5퍼센트고 조선인에게는 10퍼센트라면, 조선인에게 7퍼센트로 대출해 주겠다는 일본인이 나타날 것이다. 조선인의 처지에서 보면 은행에서 빌리는 것보다 이자가 싸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빌리려고 할 것이고, 일본인은 은행에서 이율 5퍼센트로 빌린 자금을 조선인에게 7퍼센트로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익이 발생한다. 이러한 이익을 부당 이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조선인이 일본인보다도 많은 이자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부당한 손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에 건너온 많은 일본인이 자신의 자금만이 아니라 융자를 받은 자금으로 조선인 대상 고리대업을 하여 부자가 되었다. - 27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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