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 1329~1398) 선생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한때 선생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몰래 숨겨 왔다는 말이 퍼진 적이 있습니다. <고려사> 기록에도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가지고 와서……”라고 되어 있지 숨겨 들여왔다는 내용은 없는데 말입니다. 당시 목화는 원나라 곳곳에 널리 심어져 있는 것으로 반출금지 품목도 아니어서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들어올 물건은 아니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씨앗을 가지고 다닐 때는 손바닥에 움켜쥐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주머니에 넣거나 보관하기 쉬운 작은 봉투 또는 붓두껍 같은 곳에 담는 것이 상식일 텐데, 이를 두고 훔쳐왔다는 식으로 글을 써서 퍼뜨리는 것은 선생을 마치 좀도둑으로 모는 것 같아 썩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원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가지고 돌아온 이야기는 참으로 유명하지요. 《태조실록》을 보면 “전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이 졸(卒)하였다. 익점은 진주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 조정에 갔다가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는 기록입니다.
문익점이 가지고 온 목화씨는 재배에 모두 실패하고 문익점의 장인이 심은 하나만이 성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싹을 틔우지 못한 이유는 목화씨가 인도면이라 우리나라 기후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남쪽 지방 따뜻한 곳에 재배했기에 하나라도 건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오기 이전에 우리나라는 중국 신장자치지구 고창이란 곳과 함께 단군조선 때부터 초면이 자생했는데 초면은 우리의 기후와 맞는 품종이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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