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림 한 폭 같은 이 노래를 작곡한 홍난파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입니다. 서울 종로 홍파동에는 우리나라 가곡의 선구자 홍난파(1898-1941) 선생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살던 집이 있습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아담한 서양식 2층 벽돌집 안에서는 요즈음 작은 음악회 등이 열리고 있지요. 집안에는 홍난파 선생의 일대기가 사진으로 전시 되어 있는데 그 한 모퉁이에 그의 친일행적도 적혀있습니다. 그가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주옥같은 우리의 음악을 남겼다면 겨레의 올곧은 음악가로 자리매김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홍난파는 수원의 남양 홍씨 가문에서 태어나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한 뒤 1918년 스무 살 때 일본에 유학길에 오릅니다. “조선음악 대부분이 매우 더디고 느려서 해이하고 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는 기분에 싸여 있지만 서양의 음악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쾌하고 장중하다”고 한 홍난파. 그는 조선음악에 대한 역사인식이 희박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부터 그의 민족음악개량운동은 친일음악운동으로 급격하게 변모했으며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변절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모리가와 준(森川潤)이란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뒤 ‘악단과 직업을 통하여 나라와 사회에 이바지하고 신체제운동을 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 최대의 친일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의 23명 평의원(조선인 7명, 일본인 1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가담했고, ‘황국정신을 되새기며(皇國精神にかへれ)’, ‘부인애국의 노래(婦人愛國の歌)’,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 ‘태평양행진곡(太平洋行進曲)’ 따위의 친일 노래와 ‘희망의 아침’, ‘지나사변과 음악’ 같은 친일 글도 열심히 써댔지요.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광복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고 있을 때 저 멀리 만주 벌판과 상하이에서는 그래도 조국을 찾겠다고 발버둥 치던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화가는 붓으로, 문학가는 시와 소설로, 음악가는 노래로 일제에 빌붙어 찬양하던 그 행위와 양심을 겨레의 올곧은 역사는 준엄히 심판할 것입니다. 오늘은 모리가와준 아니 홍난파가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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