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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 3237. 국권의 상징, “국새”, 언제부터 썼을까?

튼씩이 2016. 3. 4. 13:49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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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2. 4.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 문서에 사용되던 도장을 우리는 “국새(國璽)”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국새는 언제부터 썼을까요?. 《삼국사기》에는 “신라 남해왕 16년(서기 19)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 임금의 도장을 주워 임금께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도장은 실물이 전해지지 않지만, 예맥(濊貊)은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의 뿌리임을 생각하면 적어도 문헌상에 보이는 우리 겨레 국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일 것입니다.

그 뒤 고구려에서도 국새에 대한 기록이 보입니다. “차대왕(次大王)이 시해되자 좌보(左輔, 고구려 초기에, 병마'兵馬'를 총괄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어지류 가 사람을 보내서 임금의 동생을 모셔 오게 했다. 그가 오자 어지류는 꿇어 앉아 국새(國璽)를 바치며 말하기를, ‘임금이 불행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이 있으나 능히 나라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무릇 인심은 어진이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니 청컨대 보위에 오르소서.’하였다.”

이를 보면 새로운 임금을 맞이할 때 고구려 신하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국새를 올리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명과 청으로부터 받은 공식적 국새는 모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으로 ‘인(印)’자를 새겼고, 손잡이의 모양은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는 거북이였지요. 그러다 1897년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황제국가에 걸맞은 <대한국새(大韓國璽)>를 새겼고, 그밖에 <황제시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등을 새겨 쓰게 됩니다. 고종때야말로 제대로 된 나라의 위상이 세워지게 된 것이지요..

옛 얼레빗 (2012-02-28)


2260. 사랑방에 꼭 있었던 선비의 벗 연상(硯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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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사극에 보면 정갈한 사랑방에서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글을 읽는 선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선비가 책을 올려놓고 보는 앉은뱅이 책상을 서안이라 하고 그 옆에 벼루와 먹 그리고 붓을 보관하는 상자를 연상(硯床)이라고 합니다. 서안과 연상은 옛 선비들 사랑방에 꼭 놓여있었던 가구였습니다.

높이 16∼30㎝의 작달막한 연상은 윗부분에 뚜껑을 덮고 그 안에 벼루를 넣어 둡니다. 어떤 연상은 뚜껑이 없이 벼루를 바로 쓸 수 있게 해놓은 것도 있는데 이 이름은 따로 연대(硯臺)라 부르지요. 그리고 아래로는 서랍을 두어 붓이나 먹, 연적을 넣어두기도 합니다. 또 문갑이나 서안과 겸한 것들도 눈에 띕니다. 그밖에 벼루와 먹을 보관하는 작은 함이 있는데 이는 벼룻집[연갑(硯匣)]이라고 하지요.

재료로는 은행나무ㆍ소나무ㆍ먹감나무가 가장 많이 쓰였으며, 모과나무로 만든 투각장식의 연상과 나전칠기 연상은 매우 화려한 고급품입니다. 또한, 대쪽 같은 선비의 품격을 나타내는 대나무 연상도 많습니다. 벼루 10개와 붓 천 자루를 갈아치웠다는 추사 김정희와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예서, 전서, 초서, 해서, 행서체에 모두 뛰어났던 한석봉은 아마도 이 연상이 귀한 벗이었을 것입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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