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하루하루가 잔치로세(김영조)

11월 21일 - 백전을 하면 시 두루마리가 산더미처럼 쌓이지요

튼씩이 2018. 11. 21. 14:50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과목(科目)만으로 선비를 뽑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름난 정승들이 모두 다 백전(白戰)을 거쳐 진출(進出)하였고…." 이는 《정조실록》 5권, 2년(1778) 2월 9일 둘째 기록 <부교리 남학문이 여러 가지 폐습에 대해 상소하다>에 있는 내용입니다. 사전에 백전은 '무기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하는 싸움 또는 문인들끼리 글재주를 겨루는 다툼'이라고 했는데 다른 말로는 백일장이지요.



강산 천지에 활짝 핀 때 아닌 꽃 滿地江山花爛熳

구천 궁궐 쏟아지는 어지러운 옥가루 九天宮闕玉參差

양원의 서간 받는 것은 나의 일 아니어니 梁園授簡非吾事

그저 여러분과 백전시 한번 짓고 싶소 欲得諸公白戰詩


이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사람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谿谷集)》 31권에 나오는 '백전시' 한 편입니다. 조선후기 중인들은 시와 글을 짓는 시회를 결성하였고, 백전(白戰)을 열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18세기 중인문화의 중심지였던 인왕산 아래 송석원에서 봄과 가을에 열린 백전에는 수백 명이 몰려들었지요. 백전은 참가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겼고, 순라꾼도 백전에 참가한다면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전 때면 참가자들이 쓴 시를 쓴 두루마리, 곧 시축(詩軸)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지금은 오로지 대학 가기 위한 수능시험만 치를 뿐 조선 시대의 백전은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무기가 아닌 글재주를 겨루는 것, 이 시대에도 필요한 일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