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4241호) 새해는 글 아는 사람 노릇 할 수 있었으면

튼씩이 2019. 12. 31. 15:33
“오늘이 바로 섣달 그믐날 저녁이니, 자연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는 바야흐로 추위를 참느라 신음을 토하면서 혼자 앉아 매우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는데, 홀연히 인편을 통해 형이 보낸 편지를 받게 되니, 두 눈이 갑자기 확 뜨이면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가운데 줄임) 보내 주신 시고(詩稿)를 읽으면서 품평을 하려면 인편이 돌아가는 것이 다소 지체될 듯하기에, 우선 이를 보류해 두었습니다. 저의 기량을 다하여 악필(惡筆)로 끼적거린 뒤에, 송구영신하는 정초(正初)가 되었을 때, 신년에 만나 악수하는 기쁨과 맞먹는 즐거움을 드리고자 하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매천집(梅泉集)》 에 나오는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의 글입니다. 매천이 말한 섣달그믐은 음력이었을 테지만 양력 섣달그믐날인 오늘에도 매천의 이 글이 더욱 뜻깊게 생각됩니다. 《매천집》은 《매천야록(梅泉野錄)》과 함께 황현이 남긴 글로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라면 《매천집》은 시문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천의 그 유명한 절명시(絶命詩) 4수도 여기에 실려있지요.



 

보물 제1494호 <황현 초상>, 《매천집(梅泉集)》, 고려대학교 도서관


▲ 보물 제1494호 <황현 초상>, 《매천집(梅泉集)》, 고려대학교 도서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 절명시 3수 부분-

 

절명시에서 황현은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도 어렵다.”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글을 아는 사람 노릇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글 아는 사람이기를 내팽개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지난 한 해도 글 아는 사람 곧 지식인이라고 하는 한 교수가 “위안부에 대한 직접적인 가해자가 일본이 아니고 매춘의 일종이다.”라고 하여 온 겨레에게 대못을 박는 일도 있었습니다. 제발 밝아오는 경자년 새해에는 글 아는 사람 노릇도 제대로 할 수 있고, 글 아는 사람이기를 내팽개치는 사람도 없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비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