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교사가 조선사를 가르치던 중에 단군은 자기네 대화족(大和族)의 시조로 추앙되는 스사노 오노미코토(素盞鳴尊, 소잔명존)의 아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두 인물의 생존연대만 보더라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니 최수봉이 학기말의 구두시험 때 ‘소잔명존이는 우리 단군의 중현손(重玄孫, 9대손에 해당)이오.”라고 서슴없이 답했고, 그로 인해 퇴학당했다.”
이는 최수봉 지사와 함께 밀양공보를 같이 다녔던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 선생이 뒷날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 책에서 증언한 말입니다. 지사는 99년 전인 1920년 오늘(12월 27일) 아침 경남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날은 월요일이어서 경찰서장 와다나베가 훈시하고 있었는데 두 번의 투탄에도 폭탄의 불발과 폭발의 위력이 약하여 타박상을 입은 순사부장 외에는 다치거나 죽은 자도 없었습니다. 이후 지사는 실패한 것을 알고 식도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죽지 못한 채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해인 1921년 7월 8일 사형당해 순국했습니다.
하지만 최수봉 지사의 의거는 박재혁 의거가 세상을 놀라게 한 지 석 달 만에 식민통치의 맨 앞에서 조선 사람을 탄압하던 경찰서를 재차 타격하여 영남 일대의 항일 민심을 다시금 격동시켰고, 전투적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최수봉 지사는 재판정에서 “우리 3천 리 강토와 2천만 동포가 자유를 빼앗겼으니, 강토의 사용과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사로 나는 투탄한 것이다.”라고 당당히 외쳤지요. 정부는 최수봉 의사의 드높은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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