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일본 도호쿠대학에 세운 김기림 기념비
이는 일본 센다이의 도호쿠대학(東北大學) 교정에 세운 김기림 시인의 기념비에 새겨진 ‘바다와 나비’입니다. 시에서 ‘나비’는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존재 곧 당시의 지식인이며, 이 시는 거친 바다의 험난함과 흰나비의 가녀림을 압축적으로 대비한 작품이라고 하지요. 오늘은 김기림 시인이 태어난 날입니다. 일본에는 윤동주를 사랑하는 일본인 모임이 여럿 있지만, 김기림의 시를 좋아하는 일본인들도 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몰랐습니다. 도호쿠대학에 시비를 세운 지 1돌을 맞아 지난해 2019년 11월 30일에는 “김기림에게 배운다. 지금이야말로 센다이에서 일한시민교류를!”이란 행사가 열렸음을 김기림기념회(金起林紀念會) 공동대표인 아오야기 준이치 (靑柳純一) 씨는 전해주었습니다.
김기림(1908~?)은 1930년대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을 이끌던 ‘구인회’ 대표로 ‘모더니즘의 기수’라고 불리는 시인입니다. 시인은 납북이 되었는데도 1988년 해금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의 작품은 남한에서 모두 금서로 묶여 그의 이름과 작품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기림의 업적은 우리 시가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앞선 시대의 문학을 반성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이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는 바탕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또 그는 당시의 비평을 한 차원 끌어올려 작품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한 탁월한 비평가이기도 했습니다. 김기림의 작품으로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등의 시집과 평론집 《문학개론》,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지요.

▲ 김기림기념회(金起林紀念會) 공동대표인 아오야기 준이치 (靑柳純一) 씨와 김기림 기념비를 만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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