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안에는 ‘원각사터 10층 석탑’이 있습니다. 높이 12m나 되는 이 탑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어서 백탑(白塔)이라는 별명이 생겼지요. 정조 때 이 탑골 주변의 지식인들이 모여 ‘백탑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당대 집권세력이던 노론 명망가 출신의 양반인 박지원ㆍ홍대용과 비록 서얼이지만 세상의 폐단과 새로운 학문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들이었습니다.
▲ 탑골공원에 하얗게 솟은 원각사탑(圓覺寺塔)이 저 뒤로 보이는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 안중식, 지본담채, 23.4 x 35.4cm, 1912, 간송미술관
그들은 차별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고 조선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습니다. 정조(正祖) 시대인 1776~1800년간 힘을 얻었던 백탑파(白塔派) 선비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하며 이들은 또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이기도 합니다. 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깨닫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한 실학자(實學者)들이지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북학의(北學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연기(湛軒燕記)》 등이 그들이 대표적인 책입니다.
특히 백탑파는 당시 지배이념이면서 관념으로 흐르던 주자 학설을 좇는 것을 거부하고 자주적 학문의 자세를 지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백성의 삶을 보듬는 이용후생의 학문을 여는 데도 앞장섰습니다. 또 조선 사회 현실을 바로 보고 청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여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던 사람들입니다. 백탑파는 비록 자신들을 중용한 정조가 죽으며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그 사상은 19세기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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