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334. 한 일가 무덤에서 출토된 17세기 남녀 일상옷

튼씩이 2016. 7. 19. 07:52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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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7. 19.



1969년 울산광역시 신정동 학성이씨(鶴城李氏) 일가 무덤에서 1969년 출토된 중요민속문화재 제37호 유물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조선시대 한 문중의 남녀 일상옷입니다. 이 유물은 이천기(李天機: 1610∼1666) 무덤, 그의 부인 흥려박씨(興麗朴氏)의 무덤, 그리고 이천기의 셋째 아들 이지영(李之英)과 그의 부인 평해황씨(平海黃氏) 부부 합장묘에서 출토된 10점의 유물들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유물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광다회대(廣多繪帶)”와 “솜소모자(小帽子)”지요. “광다회대(廣多繪帶)”는 ‘광다회(廣多繪)’라고도 불렸던 조선시대 남자들의 실띠[絲帶]로 관복(官服)이나 사복(私服)에 쓴 넙적한 형태의 띠입니다. 이천기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출토 당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나 1997년 보수한 뒤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띠의 너비는 3㎝이며 본래 길이는 알 수 없으나 보수 뒤 양 끝에 달린 10㎝ 길이의 술을 포함하여 221㎝가 되었지요.

솜소모자(小帽子)는 이천기의 무덤서 2점이 출토되었습니다. 검은 파랑빛 고운 면포와 명주로 만들어진 것인데 머리 부분에는 세모꼴 6조각을 이어서 만들고 그 아래에 직사각형 두 조각을 이은 넓은 띠 조각을 둘렀습니다. 소모자 유물 2점의 크기는 같은데 머리 둘레가 68㎝이고 높이는 25㎝입니다. 그리고 면포 소모자에는 모자의 하단 테 부분에만 솜이 확인되고 모자 윗부분은 겉감만 남은 상태이며 명주 소모자는 전체적으로 솜이 두텁게 들어있으나 안감은 없는 상태이지요. 이 유물로 우리는 17세기 이후의 의생활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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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속풀이 272>

서울과 연변, 열여덟 번째의 만남



지난주에는 6월, 대전에서 열렸던 제21회 <한밭 전국국악경연대회>이야기를 하였다. 최고상은 대통령상으로 관악과 현악, 판소리, 전통무용 등 4개 분야였고, 각 분야는 학생부와 일반부, 특히 무용은 학생부와 일반부 위에 명인부가 포함되었다는 점, 한국의 전통음악이나 춤은 장단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점, 연주태도나 올바른 자세나 시선, 특히 각자의 개성을 살리는 표현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밭대회의 특징이라면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관심이 매우 높다는 점인데, 《대전사랑 시민모임》이 전국에서 모인 심사위원들을 성의껏 맞이해 주었고, 출전자가 지난해에 견주어 2배 이상 몰렸으며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졌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였다. 바라는 점은 현재의 관악, 현악, 판소리, 무용분야 외에 정가(가곡, 가사, 시조), 경서도 좌창, 선소리, 풍물굿 분야까지 포함하여 보다 확대된 경연대회를 만들어 나간다면 국내 최고의 국악경연 대회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등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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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지난 7월 1~2일 열여덟 번째 중국에서 가진 <한ㆍ중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이 행사는 해마다 이맘때, 중국의 연변예술대학에서 행해지고 있는 연례행사의 하나이다.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의 “전통음악학회”와 중국의 “연변예술대학”과 “연길 조선족민요협회”가 중심이 되어 예술대학에서, 다음날에는 별도로 “연길시 조선족예술단”에서 학술과 실연을 교류하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이번에 참가하게 된 한국의 국악인들은 단장인 필자를 비롯하여 정가의 박문규 명인, 초당대 조혜영교수와 정효정교수, 서도소리 배뱅이굿의 전수조교인 박준영 명창, 인천의 유춘랑 명창, 대전시 판소리 예능보유자인 고향임 명창, 양희빈 판소리 명창, 송서 율창의 이기옥, 김인숙 명창, 순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병혜 명창과 그에게 배우고 있는 서편제 소리사랑 회원들, 추점순 경기명창 등이 각기 그의 후배들이나 제자들을 대동하고 참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행사를 밀착 취재하기 위해 <신한국문화신문>의 김영조 기자도 동행하여 총 33명이 중국 연변행 비행기에 올랐다.

행사를 열게 된 계기나 취지는 필자의 인사말에 잘 나타나 있기에 그 앞부분을 여기에 옮겨본다.
“작년의 만남이 엊그제 같은데, 또 다시 1년이 지나 이제 우리는 열여덟 번째 만남의 장에 함께 서 있습니다. 매년 정답게 만나는 우리들의 여름 만남은 점잖게 앉아서 속을 감추고 격식을 차리는 서먹한 자리가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이, 또는 형과 동생이 서로 떨어져 지내면서 그동안 쌓이고 밀렸던 이야기들을 1년에 한번 만나서 정답게 학술과 음악으로 풀어내는 정례적인 교류모임인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은 25년이 훌쩍 지난 1991년 7월에 시작되었고, 2000년 이후에는 정례화 되었으며 만남을 통해 민족문화 유산을 후손들에게 전승하는 길에서 더욱 공고한 초석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류행사가 1991년 7월에 시작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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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죽(竹)의 장막으로 알려져 있던 중국, 우리와 교류가 없었던 중국 땅에서 여교수 한 사람이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그는 동포들이 모여 산다는 연변에서 왔으며 연변예술대학에서 민족성악을 가르치고 있는 전화자 교수라는 사람이었다. 북한의 성악을 배워 그곳 연변에서 동포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남쪽의 민요를 접한 뒤, 민족의 성악을 폭넓게 공부하기 위해 남한으로 온 것이다.

전화자 교수는 당시 국립국악원에서 명창들에게 경기소리와 서도소리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국악원장의 소개로 그를 알게 되었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전통음악을 공부하는 예술학교가 그 곳 연변에 있다는 점이나, 그 학교에는 전통민요를 비롯하여, 판소리를 배우는 학생, 가야금이나 피리, 장쇄납, 저대, 해금과 같은 전통악기들을 배우는 학생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중국땅에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배우는 학교가 있고 학생들이 있다는 소리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특히 안기옥이나 정남희로부터 가야금 산조를 배워서 연변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던 김진 교수를 비롯하여 피리와 퉁소, 단소와 해금, 작곡이나 이론 등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있다는 사실에 나의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기 시작한 것이다.

안기옥이 누구인가?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의 제자로 1950년 전후에 월북하여 평양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해 온 사람이다. 바로 김진이 그곳에 가서 안기옥에게 산조음악을 배워 연변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김진 교수의 제자로는 가야금 음악으로 중국의 비물질 문화재보유자로 인정받고 있는 김성삼 교수, 한국에 나와 중앙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25현 가야금을 확산시킨 김계옥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음악이 사회적 산물임을 감안할 때, 남쪽에서 전승되어 온 김창조ㆍ한성기ㆍ김죽파로 이어진 가야금 산조와 김창조ㆍ안기옥ㆍ김진으로 이어진 북쪽의 가야금 산조는 상호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이 점들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중국과의 교류는 기대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전 교수는 동포들이 살고 있는 연변땅에 전통음악을 가르치는 대학뿐이 아니라, “조선족예술단“이라는 공연단체가 힘겹게 민족의 음악을 지켜가고 있다는 사실도 전해 주었다. 그 단체는 어떤 악기로 어떠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을까, 노래는 어떤 형태이고 춤은 또한 어떠할까? 모든 것이 궁굼하고 확인하고 싶은 충동만이 커져갔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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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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