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4630호) 봄이 다 지나도록 솜옷을 벗지 못하네

튼씩이 2021. 6. 29. 07:49

襪底江光緣浸天(말저강광연침천) 버선 밑 강 빛은 하늘에 잠겨 푸른데

昭陽芳艸放筇眠(소양방초방공면) 소양강 방초에 지팡이 놓아두고 자네

浮生不及長堤柳(부생불급장제류) 뜬 인생 긴 둑의 버들에 미치지 못하여

過盡東風未脫綿(과진동풍미탈면) 봄이 다 지나도록 솜옷을 벗지 못하네

 

 

이는 조선 말기의 한학자, 개화 사상가인 고환당(古懽堂) 강위(姜瑋)가 춘천 소양강의 버들 둑에서 길을 가던 도중 회포를 읊은 ‘수춘도중(壽春道中)’이란 한시입니다. 발아래 소양강 빛은 하늘에 잠겨 푸른데, 소양강가에 피어 있는 방초에 지팡이를 던져두고 잠을 청합니다. 부평초같이 둥둥 뜬 내 인생은 저 긴 둑에 자란 버들보다도 못한데, 봄이 다 지나가지만, 겨울에 입던 솜옷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곧 때를 만나지 못한 울분의 잠재의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이건창, 정만조가 펴낸 강위(姜瑋)의 시문집 《고환당집(古歡堂集)》

 

 

 

무인(武人) 집안에서 태어난 강위(姜瑋)는 문인(文人)이기를 바랐지만, 신분적 한계 때문에 길이 막힘을 알고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4년 동안 배웠으며, 민노행이 죽은 뒤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도와 북청에 귀양간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5년 남짓 공부하였습니다.

 

김정희, 오경석과 함께 조선 후기에 금석문을 연구하였으며,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과 함께 조선말의 3대 시인으로 불린 것은 물론 김삿갓 등과 함께 조선의 방랑 시인의 한 사람으로도 꼽힙니다. 강위는 고심하며 시를 짓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시를 다듬고 고치는 일도 거의 없었지요. 그러나 개성이 뚜렷하고 관습적 표현을 배격한 시편들은 강위를 당대 으뜸 시인으로 꼽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평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