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이 탄복한 청렴한 선비, 정범조
정조 경신년(1800년) 여름, 나는 법천에 갔는데 해좌공이 손을 붙잡으며 기쁘게 맞아주셨다. 그때 집안사람이 벽장의 시렁 안에서 종이 한 묶음을 꺼내 가지고 나가니, 공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찬찬히 살펴보니, 대체로 식량이 떨어진 지 며칠 된 형편이었다. 종이를 팔아 70전을 얻어서 쌀을 사고 말린 고기 한두 마리를 사서 손님들을 대접해주었는데, 그 종이는 비문(碑文)이나 비지(碑誌)를 청하는 자가 폐백으로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은 태연한 모습이어서 깜짝 놀라 탄복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 1723∼1801년)에게 채제공의 비문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정범조는 벼슬이 예문관 제학,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인물입니다. 학문과 문장도 뛰어났지만 청렴하고 단아한 인품 때문에 더욱 추앙을 받았지요.
그 정범조는 식량이 떨어진 지 며칠이 될 정도로 살림 형편이 어려웠지만, 찾아온 손님에게 내색을 하지 않고 폐백으로 받은 종이마저 내다 팔아 대접했던 것입니다. 공자는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서 “도에 어긋날까 걱정해야지 가난을 근심해서는 안 된다 君子憂道 不憂貧”라고 강조했는데 정범조는 그런 교훈을 지킨 셈입니다. 그가 떠난 지 200년이 되는 요즈음 정범조 같은 선비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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