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책을 읽자

불놀이 - 조정래

튼씩이 2010. 12. 27. 13:51

 



해방 이후를 거쳐 6. 25로 이어지기까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좌우가 대립하던 시절 자의든 타의든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못사는 사람도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진 자들을 향해 폭력과 억압을 일삼았던 한 사나이가 신분을 속이고 29년을 살다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한 남자의 전화를 받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자신의 의지보다는 무지로 인해 좌우의 싸움에 휘말리게 된 한 남자와 그 남자로 인해 한 가문이 쑥대밭이 되고 가문의 원한을 갚기 위해 10년 동안 원수를 찾아다니는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우리의 역사를 얘기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책을 잡은 지 하룻만에 다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상당한 규모의 철강기업을 운영하며 재력을 축적한 황복만 사장은 어느 날 의문의 전화를 받는다. “배점수 씨, 당신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지 않소?”로 말문을 연 사내는 황 사장이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회정리를 떠나오기 전 이데올로기의 파고에 휩쓸리면서 지주였던 신씨 가문의 장정 38명을 죽였다는 사실을 29년이 흐른 지금 일깨우기 시작한다. 자신은 농노로 평생을 바쳤으나 땅 못 가진 설움을 아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리라 결심한 황 사장의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배운 대장장이 일에서 그는 살육의 무기가 된 창을 만들었던 것이다.

좌익 사상을 따르는 방 선생의 도움으로 글을 익히던 배점수는 그사이 ‘빨강물’이 들어 점점 깊이 활동에 참여하면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고, 비루하고 가난했던 사람이 잘사는 새 세상이 당장 찾아오리라는 믿음으로 가진 자들을 향해 폭력과 억압을 일삼는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힘의 대결로 마을에서 도망쳐 결국 산사람이 되었고, 빨치산 조직이 와해되면서 타지로 떠난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모자란 척 행동하며 이리저리 휩쓸리다 부산까지 흘러든 그는 대장장이 일을 다시 시작해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면서 급기야는 피란민들에게 주어진 가(假)호적 신고를 이용해 출신지와 신상기록을 바꿈으로써 황해도 출신으로 거듭난다.

역시 그 사내에게 전화를 받은 황 사장의 아들이자 대학의 전임강사인 황형민은 “아버지의 죄를 확인할 책임”을 지기 위해 난생처음 회정리로 찾아가 숨겨졌던 과거와 조우한다. 아버지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그가 지주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 도망친 후 그녀는 보복으로 당산나무에 묶인 채 맞아 죽었으며, 다섯 살이었던 이복형은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으로 정신적 불구상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네 차례의 전화통화를 통해 자신이 배점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버지와 겁탈당한 어머니의 아들임을 밝힌 신찬규는 집안 어른들의 억울한 죽음과 죽기 전까지 울화병으로 고통당한 어머니의 원한까지 갚기 위해 9년 3개월을 가깝도록 월부 책 장사일을 하며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사진 한 장을 근거로 찾기 시작한 그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이루게 되고 선대의 원한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배점수의 목숨을 옥죄인다. 신찬규가 사건 당시 어머니 뱃속에 이미 있었음을 알지 못한 황 사장은 아들에게 협박당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충격이 더 컸고, 사선을 넘나들다 마침내 세상을 떠난다.

- yes24에서

 

 

2010 .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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