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410. 모레는 상강,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진 하루해

튼씩이 2016. 10. 21. 11:20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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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10. 21.



모레 23일 일요일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상강(霜降)”입니다.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벌써 하루해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면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릅니다.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수채색 물감으로 범벅을 만든 듯 누렇고 빨갛게 바뀌었지요. 그리고 서서히 그 단풍은 하나둘 떨어져 지고 나무들은 헐벗게 됩니다. 옛 사람들의 말에 “한로불산냉(寒露不算冷),상강변료천(霜降變了天)”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한로 때엔 차가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상강 때엔 날씨가 급변한다.”는 뜻입니다. 상강이야말로 가을 절기는 끝나고 겨울로 들어서기 직전이지요.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진 날 한 스님이 운문(雲門, 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람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운문 선사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니라. 나무는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고(體露), 천지엔 가을바람(金風)만 가득하겠지.”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상강이 지나면 추위에 약한 푸나무(식물, 植物)들은 자람이 멈추지요. 천지는 으스스하고 쓸쓸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로 들어가는데 들판과 뫼(산)는 깊어진 가을을 실감케 하는 정경을 보여줍니다.

이 삭막한 서릿발의 차가운 세상. 하지만 국화 뿐 아니라 모과도 상강이 지나 서리를 맞아야 향이 더 진하다고 하지요. 꽃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향기는 느끼는 자의 몫이며, 상강을 맞아 그 진한 국화 향을 맡을 수 있는 것도 각자의 몫입니다. '감국(甘菊)'이라고 불리는 노란 국화로 만든 국화차는 지방간 예방에 좋은 콜린, 대사에 필요한 에너지로 쓰이는 아데닌이 풍부하여 이때 마시면 좋을 일이지요. 또 상강 무렵엔 비타민CㆍA, 탄닌, 칼륨과 마그네슘 등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으며 고혈압 예방에 좋은 감을 먹어 좋을 때이고, 그밖에 상강 즈음 먹어서 좋을 먹거리엔 살이 쪄 통통한 게도 있습니다.

옛 얼레빗 (2012-10-24)



2401. 글씨를 왼쪽부터 쓴 숙정문과 혜화문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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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자로 쓰인 편액(현판)들을 보면 모두 글씨가 오른쪽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 예로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은 물론 순천 선암사 뒷간 한글편액도 역시 오른쪽부터 쓰였지요. 그런데 한양 성곽 4대문의 하나인 숙정문과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은 왼쪽부터 쓰였습니다. 최근 한양 성곽나들이를 다녀온 분들이 이에 대해 의문을 던졌지요.

원래 문화재 복원은 원형대로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1396년 완공된 숙정문이나 혜화문의 편액도 당연히 오른쪽부터 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숙정문은 1976년, 혜화문은 1992년 복원하면서 편액도 새로 만들어 달았습니다. 그때 복원의 주체들과 편액을 만들었던 장인들이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현대에 맞춰 왼쪽부터 쓰기로 했다고 합니다.

상징성을 고려해서 한글로 달자며 한글단체가 강력히 주장했는데도 광화문 편액은 굳이 원형대로를 고집하며 한자로 써 달았는데 숙정문과 혜화분 복원 때는 왜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들리기로는 군사정권의 권력 남용과 무지 때문이라고도 합니다만 아쉬움은 남습니다. 원형을 떠나서도 한자 가로쓰기는 오른쪽부터 쓴다는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으니 이를 보는 국민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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