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56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41,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슬기’와 ‘설미’

우리 토박이말에는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에 쓸 낱말이 모자라 그 자리를 거의 한자말로 메워 쓴다. 이런 형편은 우리말이 본디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머리를 써서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우리말을 팽개치고 한문으로만 그런 일을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으면 말은 거기 맞추어 생겨나는 법인데, 그들은 우리말에 도무지 마음을 주지 않았다. 조선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이천 년 동안 그런 분들은 줄곧 한문으로만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려 했기에 우리말은 그런 쪽에 움도 틔울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노릇은 이처럼 애달픈 일을 아직도 우리가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려는 학자들이 여전히 우리말로 그런 일을 하려 들지..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40,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쉬다’와 ‘놀다’

‘쉬다’와 ‘놀다’는 싹터 자라 온 세월이 아득하여 뿌리를 깊이 내렸을 뿐만 아니라 핏줄이 본디 값진 낱말이다. 핏줄이 값지다는 말은 사람과 삶의 깊은 바탕에서 태어났다는 뜻이고, 사람이 목숨을 누리는 뿌리에 ‘놀다’와 ‘쉬다’가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삶에서 그처럼 깊고 그윽한 자리를 차지한 터라 여간 짓밟히고 버림받아도 뿌리까지 죽어 사라질 수가 없는 낱말인 것이다. ‘쉬다’는 ‘움직이다’와 짝이 되어 되풀이하며 사람의 목숨을 채운다. 엄마 배 안에 있을 때는 ‘쉬다’와 ‘움직이다’를 아주 잦게 되풀이하다가 태어나면 갑자기 되풀이가 늘어진다. 늘어진다 해도 갓난아기는 하루에 여러 차례 되풀이를 거듭한다. 배고프면 깨어나 울면서 움직이다가 젖을 먹이면 자면서 쉬는 되풀이를 하루에도 여러 차례..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39,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솟다’와 ‘뜨다’

박두진의 이름 높은 노래인 는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이렇게 시작한다. 이 노래가 쓰인 1946년은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때인데도,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아직 솟지 않았다고 느꼈던가 보다. 그러고 보면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도 남과 북은 갈라져 원수처럼 지내자는 사람들이 많고, 정권에만 눈이 어두운 정치인들은 힘센 미국만 쳐다보며 셈판을 굴리는 판국이니, 우리 겨레에게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여전히 솟지 않았다고 해야 옳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는 솟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온통 ‘해가 뜬다’라고만 한다. 그렇다면 ‘솟다’는 무엇이며, ‘뜨다’는 무엇인가? ‘솟다’는 제힘으로 밑에서 위로 거침없이 밀고 올라오는 것이고, ‘뜨다’..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38,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속’과 ‘안’

‘속’과 ‘안’은 본디 아주 다른 낱말이지만, 요즘은 모두가 헷갈려 뒤죽박죽 쓴다. · 속 : ① 거죽이나 껍질로 싸인 물체의 안쪽 부분.② 일정하게 둘러싸인 것의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 안 : 어떤 물체나 공간의 둘러싸인 가에서 가운데로 향한 쪽, 또는 그런 곳이나 부분.《표준국어대사전》 국어사전의 풀이만으로는 누가 보아도 무엇이 다른지 가늠하기 어렵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밖에도 여러 풀이를 덧붙여 달아 놓았으나, 그것은 모두 위에서 풀이한 본디 뜻에서 번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본디 뜻을 또렷하게 밝혀 놓으면 번지고 퍼져 나간 뜻은 절로 졸가리가 서서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본디 뜻을 흐릿하게 해 놓으니까 그런 여러 풀이가 사람을 더욱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우선 ..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37,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소리’와 ‘이야기’

‘소리’와 ‘이야기’는 본디 서로 얽히지 않고 저마다 또렷한 뜻을 지닌 낱말들이다. “번개 치면 우렛소리 들리게 마련 아닌가?”“밤도 길고 심심한데 옛이야기나 한 자리씩 하면 어때?” 이렇게 쓸 때는 ‘소리’와 ‘이야기’가 서로 얽히거나 헷갈리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데서는 ‘소리’나 ‘이야기’가 모두 ‘말’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면서 서로 넘나든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합디까?”“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디까?” 그러나 서로 넘나드는 것이 바르고 마땅할까? ‘소리’와 ‘이야기’는 본디 뜻이 서로 다른 만큼, 넘나들 적에도 뜻의 속살은 서로 다르다. 그 다름이 뚜렷하지 않고 아슬아슬하지만, 아슬아슬한 얽힘을 제대로 가려서 쓸 수 있어야 참으로 우리말을 아는 것이다. 국어사전들은 ‘말’과 비슷한 뜻의 ‘..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36,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샘’과 ‘우물’

우리나라는 지구라는 이 땅덩이 위에서 물이 가장 좋은 곳이다. 물을 받아 담아 두는 흙과 돌과 바위가 목숨에 좋은 갖가지 원소를 품고서 물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겨레는 물을 먹고 쓰려고 마련한 자연의 그릇도 여러 가지를 썼다. 그런 그릇 가운데 가장 많이 쓴 것이 ‘샘’과 ‘우물’이다. 그러나 요즘은 샘과 우물이 삶에서 밀려나 자취를 감추려 한다. 삶의 전통을 지키려면 말의 박물관이라도 서둘러 만들어야 할 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샘’을 “물이 땅에서 솟아 나오는 곳”이라 풀이하고, ‘우물’을 “물을 긷기 위하여 땅을 파서 지하수를 괴게 한 곳”이라 풀이해 놓았다. ‘우물’을 ‘물을 긷기 위하여 괴게 한 것’이라 하면, 먹으려고 긷는지 쓰려고 긷는지 가늠할 수가 없..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35,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삶다’와 ‘찌다’

사람은 불을 찾고 만들어 다스리면서 삶의 길을 가장 크게 뛰어올랐다. 겨울의 추위를 물리치고 밤의 어두움을 몰아내면서 삶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날것으로 먹을 수밖에 없던 먹거리를 굽거나 삶아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삶의 길을 뛰어오르는 지렛대의 하나였다. 굽는 것은 먹거리 감을 불에다 바로 익히는 노릇이고, 삶는 것은 먹거리 감을 물에 넣어서 익히는 노릇이다. ‘삶다’는 물에 먹거리 감을 넣고 푹 익히는 것이다. 감자나 고구마, 토란이나 우엉같이 단단한 뿌리 남새(채소)라면 삶아서 먹는 것이 제격이다. 그러나 단단하지 않은 것이라도 날것으로는 먹기 어려운 것들, 일테면 박이나 호박 같은 남새(채소)는 말할 나위도 없고, 무엇보다도 짐승의 고기는 삶아야 제대로 맛을 즐기며 먹을 수..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34,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사투리’와 ‘토박이말’

‘사투리’는 ‘대중말’(‘대중’은 “눈대중이 매섭다”, “대중없이 왜 이랬다저랬다 해?”에서처럼 ‘가늠’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대중말’과 같은 뜻으로 ‘표준말’을 쓰지만, 그것은 일본에서 온 ‘들온말’이다.)에 맞선다. 대중말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국민이 막힘없이 주고받도록 규정에 맞추어 마련해 놓은 말이고, 그런 규정에서 밀려난 우리말은 모두 사투리다. 사투리에는 어느 고장에서만 쓰는 사투리도 있고, 어떤 사람이나 모둠에서만 쓰는 사투리도 있다. ‘토박이말’은 ‘들온말(외래어)’에 맞선다. 들온말은 가까운 중국과 일본과 몽고를 비롯하여 멀리 서양 여러 겨레(민족)에게서 들어왔다. 이렇게 남의 말에서 들어온 것을 뺀 나머지는 모두 토박이말이다. 토박이말은 우리에게서 저절로 싹트고 자라난 우리말..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33,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뽑다’와 ‘캐다’

‘뽑다’는 박힌 것을 잡아당겨서 빼내는 노릇이다. ‘박힌 것’이란 온갖 풀이나 나무나 갖가지 남새(채소), 곡식의 뿌리라든지 짐승이나 사람의 이빨같이 자연히 박힌 것을 비롯해서, 못이나 말뚝같이 사람이 박은 것까지 싸잡아 뜻한다. 게다가 뜻 넓이가 더욱 번져 나가면서 몸에서 피를 뽑듯이 땅속에서 기름도 뽑고 물도 뽑는다. 게다가 거미 꽁무니에서 줄을 뽑고, 사람의 목에서 노래 한 가락을 뽑고,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버릇을 뽑듯이 속에 있는 것을 나오게 한다는 뜻으로도 쓴다. 그뿐 아니라 반장이나 대표를 뽑듯이 골라잡는다는 뜻, 장사에서 밑천을 뽑듯이 거두어들인다는 뜻으로까지 넓혀서 쓴다. ‘뽑다’를 본디 제 뜻, 곧 푸나무와 남새와 곡식같이 땅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을 빼낸다는 뜻으로 쓸 적에는 비슷한..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32,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부리나케’와 ‘불현듯이’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 덕분(?)으로 요즘 우리 겨레의 옛 삶이 뚜렷이 드러나면서 중국 사람뿐만 아니라, 온 천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고조선의 중심이었던 요하 가장자리에서 일어난 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로 손꼽혀 온 중국 황하 문명보다 오백 년에서 천 년이나 앞선 사실이 환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을 일으켜서 먹거리를 익히고, 그릇을 굽고, 청동기를 만들어 사냥과 농사를 바꾸는 일을 황하 언저리의 중원 사람들에게 가르쳤다는 사실 또한 드러났다. 이는 동이족인 염제 신농씨가 중국으로 불을 가져가 농사를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한갓 신화가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겨레가 불을 쓰며 살아온 세월이 오래라 그런지, 우리말에는 불에 말미암은 낱말이 여럿이다. ‘부리나케’와 ‘불현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