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 5

《광해군일기》 – 묘호(廟號))를 못 받은 임금의 역사

▲ 《광해군일기》, 조선 1634년, 44.5×31.0cm, 국보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아래 《 실록》) 가운데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 시기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사실을 연월로 기술하는 편찬 방법)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1624년(인조 2)부터 편찬이 시작되었고, 1633년(인조 11) 중초본(中草本)’ 1부가, 이듬해 5월에 중초본을 검토하고 옮겨 쓴 정초본(正草本) 2부가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광해군일기》 중초본’은 태백산 사고(경북 봉화)에, 정초본 2부는 정족산 사고(강화도)와 적상산 사고(전북 무주)에 1부씩 봉안(奉安)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해군일기》는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었던 1책..

(얼레빗 제4859호) 김육, 백성의 삶 체험하고 대동법 외쳐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보고를 올리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가운데 줄임) 지금 만약 시행하면 백성 한 사람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위는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1638년) 9월 27일의 기록입니다. 김육은 대동법의 시행이 백성을 구제하는 방편이면서 나라 재정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시책이라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물론 처음에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지만, 효종을 설득하여 효종 2년에는..

주경야독 끝에 대동법을 관철한 김육

주경야독 끝에 대동법을 관철한 김육 옛 역사는 보고 싶지가 않네 古史不欲觀 볼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걸 觀之每并淚 군자들은 반드시 고통을 당하고 君子必困厄 소인들은 득세한 자들이 많으니 小人多得志 성공할 즈음이면 문득 패망 싹트고 垂成敗忽萌 편안해질 듯하면 이미 위태함 따라오네 欲安危已至 삼대시대 이후로 오늘날까지 從來三代下 하루도 올바로 다스려진 적 없는데 不見一日治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生民亦何罪 저 푸른 하늘 뜻 알 수가 없네 冥漠蒼天意 지난 일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旣往尙如此 하물며 오늘날의 일이겠는가 而況當時事 조선 중기 문신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년)이 지은 「관사유감(觀史有感, 옛 역사를 보면)」입니다. 소인들이 권세와 명예와 부를 차지하고 군자는 늘 고통을 면치 못..

(얼레빗 4591호) 북벌은 실패했지만, 대동법을 시행했던 효종

청강(淸江)에 비 듣는 소리 그 무엇이 우습건대 만산홍록(滿山紅綠)이 휘드르며 웃는구나. 두어라 춘풍(春風)이 몇 날이리 웃을 대로 웃어라. 위 한시는 조선의 제17대 임금 효종(孝宗, 1619-1659)의 칠언절구입니다. 초장에서 맑은 강물 위에 떨어지는 봄비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 웃고 있다고 합니다. 중장에서 웃는 것은 온 산에 붉고 푸르게 피어나는 꽃과 잎들이라고 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과 잎들이 마치 사람처럼 봄비를 반기며 웃고 있다는 것이지요. 종장에서 따뜻한 봄바람이 얼마나 가겠느냐며, 꽃과 잎들이 봄날을 마음껏 즐기도록 놓아두라고 합니다. 효종의 여유 있는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 경기도 여주에 있는 17대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무덤 영릉(寧陵) 효종은 병자호란이 나자 강화에 피난했..

(얼레빗 4108호) 충혈된 광해군의 눈, 안질이냐 광폭해서냐?

한국문화편지 4108호 (2019년 06월 26일 발행) 충혈된 광해군의 눈, 안질이냐 광폭해서냐?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108][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재청은 6월 25일 《조선왕조실록》 96책을 확인해 국보로 추가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에 추가로 국보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