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김영조)

주경야독 끝에 대동법을 관철한 김육

튼씩이 2022. 1. 5. 12:51

주경야독 끝에 대동법을 관철한 김육

 

 

옛 역사는 보고 싶지가 않네                       古史不欲觀

볼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걸                       觀之每并淚

군자들은 반드시 고통을 당하고                  君子必困厄

소인들은 득세한 자들이 많으니                  小人多得志

성공할 즈음이면 문득 패망 싹트고              垂成敗忽萌

편안해질 듯하면 이미 위태함 따라오네        欲安危已至

삼대시대 이후로 오늘날까지                      從來三代下

하루도 올바로 다스려진 적 없는데              不見一日治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生民亦何罪

저 푸른 하늘 뜻 알 수가 없네                      冥漠蒼天意

지난 일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旣往尙如此

하물며 오늘날의 일이겠는가                       而況當時事

 

 

조선 중기 문신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지은 관사유감(觀史有感, 옛 역사를 보면)입니다. 소인들이 권세와 명예와 부를 차지하고 군자는 늘 고통을 면치 못하니 백성들이야 오죽할까 생각하지요.

 

 

김육은 163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자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자고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동법 실시가 백성을 구제하는 방편이면서 나라 재정 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시책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지만 효종 2(1651)에는 호서 지방, 효종 9(1658)에는 호남 지방에도 대동법이 실시되었습니다. “호서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자 마을 백성들은 밭에서 춤추고 삽살개도 아전을 향해 짖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로 백성들은 대동법 시행을 반겼지만 대동미를 내야하는 토지소유자들, 곧 양반·지주 계급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김육은 5세에 천자문을 외우고, 12세 때 육송처사전(六松處士傳), 귀산거부(歸山居賦)를 지어 글솜씨를 뽐낸 천재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책 읽으며 농사를 짓다가 43세에 늦깎이로 출사하여 영의정까지 올랐지요. 그의 삶 가운데 가장 눈에 뜨는 부분은 주경야독(晝耕夜讀)’입니다. 김육은 1613년부터 1623년 인조반정 직전까지 10년 동안, 경기도 가평의 잠곡에서 식구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살 집이 없어 굴을 파고 서까래를 얽어 살았고, 낮에는 나무하고 저녁에는 송진으로 불을 밝혀 책을 읽었지요. 그는 주경야독하던 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밑바닥 삶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김육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강직한 인물이었으며, 개혁적인 정치가로서 치적이 많았습니다. 또 헛된 논리에 매몰된 당시 사대부와는 달리,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제안했지요. 구황촬요(救荒撮要), 벽온방(辟瘟方)같은 백성의 굶주림과 질병에 관한 책을 펴냈으며, 은광 개발, 동전 사용의 확대, 수차 보급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런 그가 죽자 효종은 김육처럼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고 국사를 담당할 사람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지요.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고집스럽게 펼쳤던 김육 같은 사람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동법     조선 중기·후기에 여러 가지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