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 9

6개월 입양아와 다섯 살 입양아

6개월 입양아와 다섯 살 입양아 고향을 떠나온 것, 무겁게 짓누르는 두려움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물론 전에는 이보다 더 심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매일 밤 자드는 잠들기 전에 한국어로 기도를 했다.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소리만 듣고 따라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자드를 보면서 생후 6개월에 입양되는 것과 다섯 살이 다 되어 입양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깨달았다. - 권지현의《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중에서 - * 새끼 오리들이 부화된 뒤 처음 만나는 대상을 어미로 알고 졸졸 쫓아다니는 현상을 '각인'(imprinting)이라 합니다. 인간도 어릴 적 어떤 각인이 일어났는가에 따라 평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모국어로 익혔던 기도라면, 그것이 만약 엄마 목소리의 기도였다면, 그것만..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말을 전하는교환학생 우리 말 우리 글 교육 동아리 ‘이화한글아씨’

최근 코로나19 방역 완화로 다양한 국적을 가진 외국인 학생들이 학교 곳곳에 자주 보인다.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어를 공부하거나 한류에 관한 관심으로 한국 문화를 더 알고자 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한국에 일정 기간 머무른다. 이화여자대학교에는 낯선 타국에서 적응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을 돕는 한국어 교육 동아리가 있다. ‘이화한글아씨’ 동아리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나아가 한국 문화까지 알리는 활동을 한다. ‘이화한글아씨’ 동아리 부원들을 직접 만나보았다. 인터뷰는 11월 1일,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진행되었다. 인터뷰에는 이화한글아씨 김가인(22학번, 사진에서 왼쪽) 씨, 최현지(19학번, 사진에서 중앙) 씨, 조서영(19학번, 사진에서 오른쪽) 씨가 참여했다. 이화한글아..

찰나의 우리말 - '외국인'은 누구인가?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는 제프리 홀리데이라는 미국 국적을 가진 교수님이 계신다. 서로 바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는 시간을 내서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그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연구 얘기부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한번은 한국어의 ‘외국인’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홀리데이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흥미롭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외국인’이라는 단어는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란다. 첫째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 사람, 둘째는 한민족이 아닌 사람, 셋째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

찰나의 우리말 - 공손성이 문법성을 이길 때

그날도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모니터를 응시하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쓰던 원고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눈동자는 모니터에 꽂아 두고 손을 뻗어 전화기를 들었다. 학교 행정직원 선생님의 목소리다. 필자에게 전할 서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 직원 선생님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교수님, 혹시 지금 연구실에 계실까요?” 이 질문에 필자는 당황했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였다. 누가 연구실에 있느냐고 묻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필자에게 가져다줄 서류가 있다는 내용임을 파악한 후에는 전화에 집중을 하지 않았기에, 집중하지 않은 동안 필자가 맥락상의 주어를 놓쳤나 ..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여행을 떠나는 이유 나에게서 모국어와 모국의 문화를 제거했더니,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남의 집 현관에서 신발도 제대로 정리 못 할 정도로 순발력 떨어지고 예상치 못한 배려에 곧잘 당황하는 어설픈 인간이었다. 그로써 좋았다. 덕분에 여태껏 몰랐던 자신을 알게 된 셈이니까. - 이지수의《아무튼, 하루키》중에서 - * 여행을 통해 새로운 곳, 음식, 사람을 알게 되지만 또 다른 나, 미처 몰랐던 나의 모습도 만나게 됩니다. 도전하는 나, 주저하는 나, 웃고 있는 나, 울고 있는 나. 그렇게 또 다른 나와 만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언어의 숨겨진 힘 - 세계 평화를 꿈꾸는 언어

소통의 매개체, 언어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 창세기 11장 중 위 구절은 성경 속 ‘바벨탑 이야기’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류는 본래 하나의 언어를 쓰고 있었는데, 인간이 신을 이기기 위해 하늘 끝까지 바벨탑을 쌓아 올리자 신이 그들을 흩어지게 하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일치단결하던 인류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자 곧 갈등을 일으켰고, 급기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져 흩어지고 말았다. 종교와 무관하게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 수긍할 만하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

[알기 쉬운 우리 새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디지털 태생'

“모태 디지털 세대.” 이 용어가 올라오자 새말 모임 위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었다. 모태라면 흔히 ‘모솔’이라는 줄임말로 불리는 ‘모태 솔로’의 그 모태겠지? 새말 모임 위원들도 모태라는 말을 듣자마자 ‘모솔’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그래서 웃음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모태 디지털’이라는 표현을 제안한 위원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모태 ○○라는 표현은 비속어가 아닙니다. ‘모태 신앙’이라는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어나기 전부터 습득하고 있다, 그만큼 익숙하다’는 뜻이지요.” 눈치를 챘겠지만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용어를 대체할 다듬은 말을 찾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미 디지털 기술 문화가 보편화한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들 기술문화를 터득하고 이용하는 세대를 일컫는 말..

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 눈으로 하는 언어생활

옆 차선에서 나란히 달리는 버스의 옆면에 큼지막하게 써진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 해 보셨습니까?” 새로 나온 영화를 홍보하는 문구 같다. 단순한 의미인데, 스치는 찰나에도 보는 이에게 여운을 남긴다. 그저 묻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 아픈 사랑을 곁에 앉아 전해 듣는 기분이라 할까? ‘광고주의 성공은 소비자의 실패’란 말을 알면서도 글에다가 큰따옴표까지 써 가며 전하는 메시지에 모든 경계를 풀어 버렸다. 문장 부호의 힘을 그렇게 크게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문장 부호를 잘못 쓰거나 안 써서 문제가 생긴 경험이 있는가? 영어 받아쓰기를 처음 할 때 겪은 일이다. 문장 끝에 마침표를 안 찍어서 애써 외워 쓴 10문제에서 0점을 받았다. 소릿값도 없는 마침표가 점수를 결정하다니! 그렇지만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