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14

(얼레빗 제4762호) 영조, 백성의 아픔에 하얀 쌀밥 못 먹겠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地, 방비가 견고한 성)가 있다고 해도 만약 백성이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하물며 북도(北道, 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는 곧 옛날 임금의 고향이다. 여러 대의 임금이 돌봐준 것이 여느 곳보다 천만 배나 더하였는데, 내가 즉위하고부터 덕이 부족해 하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지 못하고 성의가 얕아 백성들을 감복시키지 못하는지라, 수해와 가뭄으로 굶어 죽는 참사가 없는 해가 없었다. (가운데 줄임) 이는 모두 내가 민생을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보지 못하고 때맞추어 민생들을 구제하지 못한 소치니, 하얀 쌀밥이 어찌 편하랴?“ ▲ , 명주, 61.8c×110.5cm, 국립고궁박물관 이는 《영조실록》 영조 6년(1730년) 3월 26일..

(얼레빗 4758호) 임금과 왕비가 보낸 한글 편지

우리는 최만리를 비롯한 대다수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창제했어도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훈민정음이 언문이라며 외면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해지는 문헌을 보면 임금부터 왕실 어른들은 한글로 편지를 썼음을 알 수 있지요. 또 이렇게 왕실이 한글편지를 썼다면 사대부 벼슬아치들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 정조임금이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쓴 한글편지(개인소장) 특히 정조임금은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썼던 임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정조가 만 3~4살부터 46살 때인 정조 22년(1798년)까지 큰외숙모인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보낸 한글편지 16점을 모아 묵은 편지첩 《정조국문어필첩(正祖國文御筆帖)..

삐틀빼틀 쓴 글씨

삐틀빼틀 쓴 글씨 옛사람이 이르기에 '마음이 바르면 글씨가 바르게 된다'고 하였다. 대저 글자를 쓴 다음의 공교함과 졸렬함은 아직 서툰지 익숙한지에 달려 있지만, 글자의 점과 획, 테두리는 바르고 곧고 전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근래 사대부들의 필법은 가늘고 경박하고 날카롭고 삐뚜름하니, 이는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 정창권의《정조의 말》중에서 - * 글씨가 삐뚜름하다 해서 그 사람까지 삐뚜름한 것은 물론 아닐 겁니다. 하지만 글씨는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읽게 해 줍니다. 글씨는 또 하나의 자기 얼굴입니다. 표정을 보고 사람을 읽어내듯, 글씨를 보고 지적 수준과 수양의 깊이를 읽어냅니다. 옛사람들이 바른 글씨를 쓰기 위해 목숨 걸듯 각고의 노력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세자의 교육 (7) - 체육 교육과 예술 교육

7. 체육 교육과 예술 교육 왕실 교육에는 체육과 예술을 가르치는 과정이 있었다. 먼저 체육 교육을 보면 어린 시절에는 건강을 위한 체조를 가르쳤고, 점차 성장하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야 했다. 활쏘기와 말 타기는 국왕이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기능이었다. 왕실에서는 대사례(大射禮)나 연사례(燕射禮)라 하여 국왕과 신하들이 어울려 활쏘기 시합을 벌이는 예제가 있었고, 국왕이 장거리 이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말을 타고 이동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활쏘기 실력과 관련하여 정조에게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정조는 천부적이라 할 정도로 활을 잘 쏘았는데, 어떨 때에는 연속해서 만점이 나올 정도의 실력이었다. 1795년에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열었는데, 행사를 마무리하면서 신하들과 어..

조선의 세자 - 세자의 관례

5. 세자의 관례 관례(冠禮)는 성년식을 의미한다. 관례를 치르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에 관례라 했다.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서 계례(笄禮)라고 했다. 어린이와 성인은 머리모양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사대부가의 자녀인 경우, 결혼하기 전 15세~20세에 적절한 해의 정월에 날을 정해서 관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관례를 치르는 사람은 《효경(孝經)》이나 《논어(論語)》에 능통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익히고 있어야 했으며, 그 부모가 기년(1년) 이상의 상복이 없는 경우에만 거행할 수 있었다. 관례를 혼례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비록 미혼이더라도 관례를 마치면 성인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성인이 되면 낮춤말을 함부로 쓰지 않았으며,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남자는 자(字)를, 여자는..

(얼레빗 4696호) 액막이와 기쁜 일을 뜻하는 그림 <까치호랑이>

2022년 임인년은 호랑이해입니다. 원래 동아시아에서 호랑이는 영물이자 군자의 상징이었고,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었기에 19세기 조선에서는 까치와 호랑이 그림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부른다는 뜻이 담겨 집집이 이 그림을 붙이려고 했지요. 그래서 까치호랑이 그림은 민화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렸고, 그래서 민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인식됩니다. ▲ ,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특히 ‘까치호랑이’ 그림은 ‘액막이와 기쁜 일’의 뜻하기에 정초에 액운을 막고 좋은 일만 생기라는 의미를 담아 집안에 붙여두는 ‘세화(歲畵)’ 곧 ‘새해맞이 그림’입니다. 그림에 덕담이 담겨 있어 연하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되지요. 이 세화는 처음에는 궁궐이나 사대부 ..

마음을 비우고 솔바람 소리 들을까? - 홍세태, 「우음」

마음을 비우고 솔바람 소리 들을까? - 홍세태, 「우음」 시비를 겪고 나서 몸은 지쳤고 是非閱來身倦 영욕을 버린 뒤라 마음은 비었다 榮辱遣後心空 사람 없는 맑은 밤 문 닫고 누우니 閉戶無人淸夜 들려오는 저 시냇가 솔바람 소리 臥聽溪上松風 조선 후기 시인 홍세태(洪世泰)의 한시 「우음(偶吟, 그냥 한번 읊어보다)」입니다. 홍세태는 5세에 책을 읽을 줄 알았고, 7∼8세에는 이미 글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관이었지만 어머니가 종이었기 때문에 그도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홍세태를 본 사람들이 돈을 모아 속량(贖良)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홍세태는 속량만 되었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보고 벼슬에 나갈 수가 없었지요. 어릴 때 이미 자신의 처지를 알았던 홍세태..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상화를 보셨나요?

조선 후기 초상화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걸작, 보물 제1483호 을 보셨나요? 비단 바탕에 채색한 그림으로 세로 99.2cm, 가로 58cm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이채가 지체 높은 선비들이 입던 무색 심의深衣를 입고 중층 정자관程子冠을 쓴 뒤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입니다. 그런데 을 비롯한 조선의 초상화는 극사실화極寫實畵와 전신사조傳神寫照로 그렸지요. 먼저 이 초상에서 이채의 눈매를 보면 홍채까지 정밀하게 묘사되어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것은 물론, 왼쪽 눈썹 아래에는 검버섯이 선명하게 보이며, 눈꼬리 아래에는 노인성 지방종까지 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살을 파고 나온 수염을 하나하나 세밀히 그렸으며, 오방색 술띠를 한 올 한 올 거의 ‘죽기 살기..

(얼레빗 4426호) 사대부의 마음을 ‘광풍제월’처럼 다듬기

“사대부(士大夫)의 마음은 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린 곳이 없어야 한다. 무릇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을 전혀 범하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윤택해져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옷감 몇 자, 동전 몇 잎 때문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호연지기가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 하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지극히 주의하도록 하라” ▲ 연못에 비친 광풍각(光風閣), (사진 최우성 기자) 이는 다산 정약용이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전남 담양에 가면 그 유명한 명승 제40호 소쇄원이 있습니다. 소쇄원(瀟灑園)은 스승인 조광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