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 15

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 이기적인 공감은 없다

학교서 돌아오는 아이가 가방을 끌고 들어오며 “엄마, 나 좀 쉴게요.”란 말을 툭 던지더니 제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 말에 엄마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혹은 이런 경험이 있었다면, 당사자로서 어떤 답을 들어 봤는가? 이 상황에서 엄마가 하였음 직한 말을 딱 5초만 생각해 보고 가자. ‘나 좀 쉴게요.’에 대한 엄마의 대답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무슨 일인데?, 무슨 일 있니? 말 좀 해 봐.’와 같은 유형이다. 흔히 캐묻기라고 한다. 캐묻는 말을 들은 아이의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는 ‘뭘 그리 알고 싶으신가요? 그래도 지금은 좀 참으시죠. 제가 좀 힘들거든요.’와 같이 말하고 있지 않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좀 더 현실적인 다른 반응도 있었다. ‘쉬다니? 학원 가야지.’, ‘저 또 하기..

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 준말은 ‘덫’이다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은 새말을 즐겨 쓴다. 참신한 새말은 유행어가 되기도 하지만, 특히 또래들과 동질성을 느끼려는 청소년들에게 특별한 의사소통 수단이 되면서 은어가 되기도 쉽다. 인류사를 통틀어 어느 때든 새로 생기는 말이 없었으랴. 사회와 문화가 바뀌면 새말은 생성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 사회는 새말로 인한 의사소통의 책임을 청소년의 언행과 연결 짓는 경향이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온라인상에는 ‘한 해의 신조어’가 발표된다. 새말은 한 해를 살아 낸 사람들이 어떤 생각에 공감했는지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가늠하게도 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2020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코로나19 사태이다. 지구촌 모든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바이..

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한 세탁소가 봄맞이 특별행사를 기획하였다. 철 지난 겨울옷이 많이 들어올 때라, 주인은 ‘세탁을 하시면 방충 처리는 무료’라고 문 앞에 크게 붙였다. 주인의 기대와 달리, 며칠이 지나도 매출에 큰 변화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세탁소 주인이 ‘겨울옷 방충 처리를 맡기시면 세탁은 무료’로 표현을 고치자 세탁물이 갑자기 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세탁소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세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돈을 쓰더라도 세탁이 무료인 쪽을 택하는 것이 더 큰 이득으로 보인다. 현대판 조삼모사인 셈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다.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방향을 정하여 말하고, 듣는 사람은 그 방향을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예를 들어 ‘네 쌍 중 세 쌍이 결혼을 유지한다’와, ‘네 쌍 중 한 쌍은 이혼한다’는 말..

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 말은 끝까지

한국말이 낯선 외국인에게 우리말은 어떻게 들릴까? 이제 갓 한글을 떼고서 짧은 문장을 만드는 외국인 학습자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어떤 표현을 마치면서 마지막에 미소와 함께 ‘세요’를 붙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 오늘 집에 일찍 가요. 선생님, 세요.” 하고 말한다. 마치 영어의 ‘Please’처럼, 한국말에 ‘세요’를 붙이면서 설득하려는 모양새인데, 이것은 한국말 ‘세요’가 적어도 외국 사람의 귀에는 공손한 표현으로 들렸음을 알려준다. 또 많은 중국인이 말하기를, 어떤 방송프로그램에서 ‘Wuli(우리)’와 ‘Ouba(오빠)’, 그리고 ‘Simida(습니다)’가 들리면 그것은 한국 방송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어떤 중국인들은 한국말을 두고 ‘습니다(思密达, simida)의 언어’라고 불러준다. 한국..

‘너무 잘한 것 같다’라니요?

시장을 지나가는데 어디에선가 고소한 냄새가 발걸음을 잡는다. 고개를 돌리니 가게 앞 진열장에 참기름병이 나란히 놓였다. 이름표도 없는 옥색 병 앞에는 ‘진짜 100프로 순참기름’이란 말이 대문짝만 하게 적혀 있었다. 참기름만 담았다는 심정을 강조하고 싶었을 노부부의 마음이었으리라. 1차로 ‘순(純)’을 덧붙이고 2차로 ‘100프로’라고 강조하고, 3차로 ‘진짜’를 동원해야 할 만큼 심히 강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 시대가 곧 서로를 못 믿는 시대라는 속뜻으로 읽혀, 마음에 큰 돌 하나가 달린 듯했다. 강조해야 살아남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공짜도 ‘꽁짜’여야 눈 돌리고, 사랑보다는 ‘싸랑’이 멋있고, 새것이나 생것은 ‘쌔’, ‘쌩’이어야 알아듣는다. 오죽하면 한국어를 제대로 배운 외국인들이 책에서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