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7

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린 면암 최익현

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린 면암 최익현 어떤 이가 공을 세우려고 순검을 데리고 가서 순검들에게 면암 최익현 선생의 머리를 자르라고 하였다. 이에 순검들은 깜짝 놀라 ‘우리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대감의 머리에 칼을 대겠는가?’라며 꾸짖었다. 순검들이 크게 욕하고 가버리니 그의 흉계가 수포로 돌아갔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이름이 선비면서 처신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금수만도 못하다’라고 했다. 1895년 일어났던 일입니다. 당시 단발령이 내려진 상태였지만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머리는 그 누구도 자를 수 없었습니다. 1906년 홍주(洪州) 의병 80명이 갇혀 있었는데 일본 헌병이 칼을 가지고 와서 머리를 자르려고 하다가 최익현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달아났다는 이야기..

매국노 상전을 꾸짖은 여종

매국노 상전을 꾸짖은 여종 “이근택아, 너는 대신이 되어 나라의 은혜를 크게 입었는데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죽음을 면했다고 자랑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만도 못한 놈이다. 내가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어찌 개의 종이 될 수 있겠느냐?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두 동강이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나는 다시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 조선 말기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섰던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근택(李根澤, 1865~1919년)의 여종이 이근택을 크게 꾸짖으면서 한 말입니다. 이 여종은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하다 파면된 한규설의 종이었는데, 한규설의 딸이 이근택의 아들과 혼인할 때 따라간 교전비(轎前婢)였지요. 이근택이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

(얼레빗 4674호) 겨레를 위한 저항정신의 표본 김창숙 선생

“백범은 흉탄에 쓰러지고/ 단재는 수문랑(하늘의 벼슬)으로 멀리 갔네/ 가련한 손, 홀로 남은 심산 노벽자(늙은 앉은뱅이)/ 여섯 해 동안 삼각산 아래 몸져누웠도다.” 이 시는 심산 김창숙 (1879~1962) 선생이 병상에서 백범 김구와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며 쓴 시입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고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1905)이 단행되자 스승 이승희와 대궐 앞으로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시작으로 1960년 4·19 직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의장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민족운동사 중심에 서 계셨던 분입니다. ▲ 평생을 겨레를 위한 저항정신으로 살다간 심산 김창숙 선생(독립기념관 제공)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130여 명의 뜻을 모아 한국 독립을 호소..

(얼레빗 4496호)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 열사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 앞, 이재명 열사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와 인력거를 타고 가는 매국노 이완용의 어깨를 칼로 찔렀습니다. 그 뒤 도망가는 이완용의 허리 등을 다시 찌릅니다. 그리고 이완용을 완전히 처단하려는 순간 이재명은 호위순사에 의해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됩니다. ▲ 이재명 열사, 독립기념관 제공 재판정에서 이재명 열사는 일본의 핍박에도 자신은 나라에 바친 몸이므로 변론할 것이 없으나, 연루된 동지들은 죄가 없다는 주장을 의연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성재판소는 김정익 등 동지들에게 15년에서 5년형을 선고하고, 이재명 열사에게는 사형을 선고했지요. 그러나 열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

(얼레빗 4223호) 면암 선생, 단식으로 순국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신이 이곳으로 들어온 뒤에 한 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 것이면, 설사 적이 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차마 구복(口腹, 먹고살기 위하여 음식을 섭취하는 입과 배)으로써 스스로 누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마침내 음식을 물리쳐 옛사람이 스스로 ..

(얼레빗 4172호) 97년 전 오늘 애꾸눈 신규식 독립지사 숨져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썼으며, 참정ㆍ외무대신을 지낸 민영환ㆍ원임의정대신 조병세ㆍ 이조참판을 지낸 홍만식 등은 자결했지요. 이렇게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

11월 18일 - 끝까지 조선을 지키려던 한규설을 가두다

1905년 11월 17일 오후 을사늑약이 강행된 덕수궁 앞과 회의장 안은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기병 800명, 포병 5,000명, 보병 2만 명이 서울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하지요. ≪한말외교비화≫(1930)에 따르면 '슬피 부르짖는' 참정대신 한규설이 별실로 끌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