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 5

(얼레빗 4758호) 임금과 왕비가 보낸 한글 편지

우리는 최만리를 비롯한 대다수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창제했어도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훈민정음이 언문이라며 외면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해지는 문헌을 보면 임금부터 왕실 어른들은 한글로 편지를 썼음을 알 수 있지요. 또 이렇게 왕실이 한글편지를 썼다면 사대부 벼슬아치들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 정조임금이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쓴 한글편지(개인소장) 특히 정조임금은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썼던 임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정조가 만 3~4살부터 46살 때인 정조 22년(1798년)까지 큰외숙모인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보낸 한글편지 16점을 모아 묵은 편지첩 《정조국문어필첩(正祖國文御筆帖)..

평생 하늘에 부끄럼 없자고 했네 – 이현일, 「병중서회」

평생 하늘에 부끄럼 없자고 했네 – 이현일, 「병중서회」 덧없는 인간세상 草草人間世 어느덧 나이 팔십이라 居年八十年 평생에 한 일 무엇이뇨 生平何所事 하늘에 부끄럼 없고자 한 것이네 要不愧皇天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쓴 「病中書懷(병중서회, 병중에 회포를 적다)」라는 한시입니다. 1704년 이현일이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에 지은 것으로, 글쓰기를 마감한 절필시(絶筆詩)지요. 그는 죽음이 가까워오자 평생을 뒤돌아보면서 ‘하늘에 부끄럼 없고자 최선을 다했음’을 고백합니다. 높은 벼슬이나 재산을 탐하지 않았던 이현일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 시입니다. 이현일이 태어나기 전 임진왜란 때, 두사충(杜師忠)이라는 중국인이 조선에 왔다가 그의 집을 보고 “자색 기운이 1장이나 뻗어 있으니 저 집에 틀림없이 뛰어..

《조선왕조실록》 속 약자들의 패자부활전, 《소설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나쁜 남자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 속 대결에서 패한 자는 왜곡되고, 묵살당하며, 잊혀간다. 지금이야 대권을 잡지 못하거나 정권창출에 실패했다고 해서 목숨이 위태롭진 않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임금이 되지 못하거나 권력 투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가문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내가 살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살벌한 시절이었다. 그런 냉혹한 시대, 한 인간이 온 힘을 다해 투쟁에 임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역사 속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어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승자와 패자의 길은 나뉘는 법, 결국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을 아름답고 정의롭게 묘사했고, 약자는 곧 ‘악한 자’로 폄하되어 갖은 오명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책, 《소설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얼레빗 4311호) 우리말로 시문을 써야 한다고 한 김만중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국문가사예찬론’에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한문을 ‘타국지언(他國之言, 다른 나라의 말에 불과함)’으로 보았으며, 정철(鄭澈)이 지은 <사..

3월 23일 - 우리 술 이야기 하나, 바위틈 맑은 물과 녹두가루로 빚은 향온주

우리 전통술은 참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제가 그 맥을 끊어 잊힌 것들이 많지요. 그러나 곳곳에 전승돼 오는 것들이 그나마 남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향온주(香醞酒)도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인데 서울무형문화재 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특히 향온주는 임금이 마시고 신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