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49

[요즘 배움책에서 살려 쓸 토박이말]3-스승

1학년 국어 교과서 첫째 마당에 ‘나’, ‘너’, ‘우리’, ‘친구’ 다음에 나오는 말이 ‘선생님’입니다. 이 말도 제가 찾아보니 중국에서는 한자 ‘老(늙을 로)’, ‘師(스승 사)’를 써서 ‘[lǎoshī](라오씨)’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한자 ‘先(먼저 선)’, ‘生(날 생)’을 써서 ‘せんせい(센세이)’라고 하더라구요. 우리가 쓰는 ‘선생님’도 ‘선생’+ ‘님’인데 한자는 일본과 같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師傅(사부)’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나 옛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켜 ‘訓長(훈장)’이라고 한 것을 볼 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선생님’은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난 뒤부터 쓰게 된 말로 보입니다. 우리도 옛날부터 ‘선생(先生)’이란 말을 썼습니..

사전 두 배로 즐기기 - 사회가 변하면 말이 변하고,말이 변하면 사전이 변한다

상반기에 있었던 지방 공무원 9급 공채 필기시험에 출제된 국어 문제 하나를 놓고 인터넷에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바로 다음 문제다. 출제자는 정답을 1번이라고 발표했는데, 여기에 대한 반박 글이 쏟아졌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반나절‘의 뜻풀이로 ‘하루 낮의 반’도 올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하룻낮의 반’이라는 두 번째 의미가 2008년 사전이 개정되면서 추가된 풀이이기 때문이다. 1999년 “표준국어대사전”을 책자로 발간한 당시에는 ‘한나절의 반’이라는 의미만 있었는데, 이후 개정하면서 풀이가 추가된 것을 출제자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결국 해당 문제에 대한 논란은 전원 정답 처리로 마무리되었다. ▲ 1999년 “표준국어대사전” ▲ 2008년 “표준국어대사전” ..

(얼레빗 4664호) 소라로 만든 국악기 <나각(螺角)>

임금의 나들이나 군대의 행진 때 연주하는 ‘대취타’에는 이라는 악기도 있습니다. 이 나각은 길이가 40cm정도 되는 큰 소라의 살을 꺼내고, 꽁무니 뾰족한 끝부분을 갈아 취구(吹口, 나팔ㆍ피리 등의 입김을 불어 넣는 구멍)를 만들어 끼웁니다. 일정한 크기는 없으며 소라의 원형 그대로 쓰기도 하고, 천으로 거죽을 씌우기도 하며 속에 붉은 칠을 하여 치레하기도 하지요. ▲ 소라로 만든 국악기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은 《조선왕조실록》에는 ‘나(螺)’ 또는 ‘소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고려 의종 때 각종 의장을 갖는 행렬의 수레 뒤에 따르던 취라군(吹螺軍)이 이 악기를 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궁중 잔치와 군악에 사용되었고,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가운데 〈정대업(定大業)..

《조선왕조실록》 속 약자들의 패자부활전, 《소설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나쁜 남자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 속 대결에서 패한 자는 왜곡되고, 묵살당하며, 잊혀간다. 지금이야 대권을 잡지 못하거나 정권창출에 실패했다고 해서 목숨이 위태롭진 않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임금이 되지 못하거나 권력 투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가문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내가 살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살벌한 시절이었다. 그런 냉혹한 시대, 한 인간이 온 힘을 다해 투쟁에 임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역사 속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어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승자와 패자의 길은 나뉘는 법, 결국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을 아름답고 정의롭게 묘사했고, 약자는 곧 ‘악한 자’로 폄하되어 갖은 오명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책, 《소설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얼레빗 4614호) 옛 사람들 돌림병 돌자 귀신에 제사 지내

“서울에 돌림병이 크게 유행하여 사람이 많이 죽는지라, 임금이 한성부에 명하여 집계하여 보니 죽은 자가 4백 57인이 되고, 또 병조에 명하여 호군(護軍) 다섯 사람으로 하여금 성문을 지키면서 사람의 주검이 문을 나가는 것을 헤아려서 아뢰라고 하였다. 좌찬성 황보인(皇甫仁)이 고려 숙종(肅宗) 때의 옛일에 따라 돌림병 귀신에게 제사지내어 예방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는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5월 1일 치 기록으로 서울에 돌림병이 돌아 심각했음을 얘기하면서 돌림병 때문에 귀신에게 제사지내기까지 했다는 기록입니다. 우리말로 돌림병(한자말로는 전염병)이라 부르는 병들은 《조선왕조실록》에만도 259건이 검색될 정도로 고통을 받았지요. 특히 지금은 별것 아닌 홍역 같은 돌림병에도 쩔쩔 매..

경복궁 안 꼴불견 노무라단풍

『조선왕조실록』에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태종실록』에는 1406년(태종 6) “창덕궁과 건원릉에 소나무를 심도록 명하다”라는 기록도 있다. 중국 베이징의 쯔진청(자금성)이 나무가 없어 황량한 것과 달리 우리 궁궐에는 창덕궁의 터줏대감인 700년 된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돈화문 안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472호) 등 궁궐과 함께 나이를 먹어온 나무가 많다. 그러나 궁궐 안의 나무들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궁궐과 함께 파괴되고 뿌리째 뽑혀나갔다. 그 자리에는 벚꽃과 동물원 따위가 들어섰다. 조선의 법궁 경복궁 역시 민족의 수난을 고스란히 겪었다. 1915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탄된 지 5년째 되던 해 일제는 조선 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통치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얼레빗 4581호) 오늘은 곡우, 햇차를 마셔볼까요?

오늘은 24절기의 여섯째로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을 기름지게 한다는 입니다. 이 무렵부터 못자리를 마련하는 일부터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되지요. 그래서 “곡우에 모든 곡물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 같은 농사와 관련한 다양한 속담이 전합니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햇차가 나오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다례라는 말이 무려 2,062번이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엔 차를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시는 녹차(綠茶)라 부르지 않고 차(茶) 또는 참새 혀와 닮은 찻잎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작설차(雀舌茶)라고 불렀습니다. 녹차는 우리가 일본에 전해준 뒤 오랫동안 일본에 뿌리내려 그쪽 기후와 땅..

(얼레빗 4556호) 옛 여인들, 이마가 4각 되도록 솜털을 뽑아

“어찌 분칠한 것을 참 자색이라 할 수 있으랴. 옛사람의 시에, ‘분ㆍ연지로 낯빛을 더럽힐까 봐 화장을 지우고서 임금을 뵈네’라고 하였으니, 앞으로는 간택 때에 분칠하지 말게 하여 그 참과 거짓을 가리라." 이는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 11년(1505년) 1월 11치 기록입니다. 이는 단순히 분 화장만 금한 것이 아니라 참 얼굴을 알기 위하여 쓰지 못하게 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는 자연히 연지화장도 포함된 것이지요.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1호 문효공과정경부인영정 중 정경부인 모습(왼쪽), 얼굴에 옅은 북숭아꽃 색 분을 칠하고 입술연지를 발랐다. / 등록문화재 제486호 , 진수아미미용법을 따르고 있다. 이는 고종 3년(1866년)에 행해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에서도 보이는데, 초간택 시에 ..

(얼레빗 4539호) 조선 무관의 삶을 읽다, 《국역 노상추일기》

한 사람이 67년이나 일기를 썼다면 엄청난 일일 것입니다. 조선시대 무관 노상추는 현존 조선시대 일기 가운데 가장 긴 67년 동안 일기를 썼고 최근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를 국역하여 《국역 노상추일기》 펴냈습니다. 《국역 노상추일기》는 18~19세기 조선의 사회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귀중한 1차 사료입니다. 노상추가 1763년(18살)부터 1829년(84살)까지 기록한 일기에는 4대에 걸친 대가족의 희로애락, 각처에서의 관직 생활, 당시 사회의 정황 등 그를 둘러싼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지요.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원본(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노상추는 자신의 일기가 후손들에게 타산지석의 교훈이 되기를 희망하며 삶의 경험과 의례 풍습 절차, 올바른 처신 등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국역 노상..

(얼레빗 4394호) ‘호우’ 대신 ‘큰비’라고 쓰면 어떨까?

요즘 뉴스는 쏟아지는 장맛비 소식으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광주ㆍ대전 등 5개 시도에 호우경보…중대본 2단계 가동”, “서울ㆍ경기ㆍ충청 호우특보…시간당 40㎜ 폭우”, “[날씨] 수도권 호우특보…최고 150mm 더 온다”, “한ㆍ중ㆍ일 동시 장마권...집중호우 '초비상'” 같은 기사 제목에서 보듯 텔레비전이건 신문이건 너도나도 “호우” 타령이지요. ▲ 큰비가 온 뒤 침수된 섬진강 하류 부근(남원포유 제공) 《조선왕조실록》에서 “호우(豪雨)”를 찾아보면 《순종부록》 1925년 7월 20일 기록에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올 뿐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부록》은 일본인들의 손으로 간여하거나 쓰였기 때문에 크게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통틀어 《순종부록》에 단 한 번 나오는 이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