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52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5,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

세종대왕은 그야말로 하늘이 낸 사람이었습니다. 세종임금 때의 일을 기록한 《세종실록》의 분량은 전체 조선왕조실록의 10분의 1을 차지하며 현재 400쪽짜리 40권으로 번역되어 있다고 하니 세종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업적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는 다른 모든 일을 합한 것보다 더 크고 더 중요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해석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온갖 환난을 이기고 세계 유수의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 것은 세종대왕이 닦아 놓은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글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이끌어갈 원동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같이 위대한 훈민정음의 창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전번 네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 조상들이 1만여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살면..

‘윷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새 종목 지정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윷놀이’를 신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윷놀이’는 양편으로 나뉘어 윷가락 4개를 던져, 윷가락이 엎어지고 젖혀진 상태에 따라 윷판의 모든 말을 목적지에 먼저 도달시키는 편이 이기는 놀이로, 정초(正初)부터 정월대보름까지 가족과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승ㆍ유지되어 왔다. 또한, 산업화ㆍ도시화로 급격히 무너지는 사회변화에도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단절 없이 지금까지 우리 겨레의 정체성과 값어치를 담은 대표적인 전통 놀이문화로 자리매김해왔다. ▲ "모야, 윷이야!" 신나는 추임새문화 윷놀이(그림 이무성 작가) 역사문헌에서 ‘윷’의 유래와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문헌에서는 윷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윷을 ‘저포(樗蒲)’와 같은 ..

(얼레빗 제4765호) 오래 전승된 ‘윷놀이’, 국가무형문화재 됐다

배달겨레치고 ‘윷놀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윷놀이’는 정초(正初)부터 정월대보름까지 가족과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승ㆍ유지됐는데 지난 11일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새 종목으로 지정했습니다. 역사문헌에서 보면 ‘윷놀이’를 가리키는 말로 ‘저포(樗蒲)’, ‘사희(柶戲)’, ‘척사(擲柶)’라는 한자말이 있는데 우리 겨레의 우주관과 천문관을 바탕으로 음(陰)과 양(陽), 천체의 28수 등 형식의 완결성을 지니고 있지요. ▲ 국가무형문화재가 된 추임새문화 윷놀이(그림 이무성 작가) 또한, 윷가락의 다양한 지역적 분포(가락윷ㆍ종지윷 등), 윷판 없이 말로만 노는 건궁윷놀이 등 윷판의 다양한 형태, 놀이방법의 변형 등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여지가 높고, 현재에도 인터넷과..

아 다르고 어 다른 우리말 - 감사하다와 고맙다, 같은 듯 다른 쓰임새

‘감사하다’와 ‘고맙다’라는 말은 남의 도움이나 배려에 기쁨을 느끼거나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둘의 뜻이 아주 비슷하여 별다른 구별 없이 사용한다. 그런데 종종 ‘감사하다’와 ‘고맙다’를 두고 엉뚱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열정적인 우리말 지킴이 가운데 간혹 한자어를 배척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한자어 때문에 고유어가 위축되었다고 여기기에 ‘감사하다’를 지양하고 ‘고맙다’를 열심히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자의 유입은 우리말을 위축시키기보다 오히려 풍부하게 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후술하겠지만 ‘고맙다’와 ‘감사하다’의 쓰임이 완전히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감사’는 일본어에서 왔다는 잘못된 통설이 ‘감사하..

일제가 갈라놓은 창경궁-종묘 90년 만에 연결…22일 개방

서울시는 창경궁과 종묘를 90년 만에 다시 연결했다. 일제가 갈라놓은 창경궁과 종묘가 90년 만에 다시 연결됐습니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위패)를 모신 왕가의 사당으로, 국내 최초로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요, 1932년 일제가 지금의 ‘율곡로’를 개설하면서 창경궁과 종묘 사이가 끊어졌습니다. 서울시는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녹지를 조성해 끊어졌던 녹지축을 연결하는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을 마무리했습니다. 조선왕실의 발자취를 느끼며 산책할 수 있는 궁궐담장길도 새로 생겼습니다. 22일부터 개방되니 가족·지인과 나들이 다녀오세요.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 첫 삽 뜬지 12년 만에 완료 서울시는 창경궁과 종묘를 90년 만에 다시 연결했다.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

세자의 교육 (1) - 국왕을 규제하는 방법

세자의 교육 김 문 식(단국대) 1. 국왕을 규제하는 방법 국왕이라면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 살고 있지만, 조선의 국왕은 대통령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오늘날의 정부 기구는 입법, 사법, 행정 등 삼부(三府)로 나눠져 있고, 대통령은 그중에서도 행정부의 수반으로 일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왕은 삼부를 총괄하는 최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는 5년 단임제에 불과하지만 국왕의 임기는 일단 왕위에 오르면 특별한 결함이 없는 한 평생토록 지속하는 종신직이었다. 국왕은 이처럼 막강한 존재였기에 제대로 된 국왕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국가의 운명은 극도로 위험해 질 수 있었다. 실록에서 장차 ..

조선의 세자 - 세자의 책례

4. 세자의 책례 세자 책봉의식은 국왕이 자신의 후계자를 공식화하여 조선 팔도에 알리는 중대한 행사였다. 행사의 의미가 컸던 만큼 의식도 복잡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책례의(冊禮儀)는 가례(嘉禮)에 속한 의례로서 왕세자ㆍ왕세손ㆍ왕세제나 왕비ㆍ세자빈 등을 책봉하는 의식이었다. 관례나 혼례 같은 일생의례와는 달리 국가의 종통을 세우는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예치국가의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특히 세자 책봉례는 책문(冊文)이나 교명문(敎命文)에 잘 나타나 있듯이 장차 천명에 의해 부여된 왕통과 교화를 책임질 군주로서의 지위를 계승할 권리를 세자에게 부여하는 의식이었다. 세자는 국가의 대본(大本)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 지위에 부합하는 의제(儀制)가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시..

한글 위인 열전 - 세종대왕과 정의 공주

1443년 12월 30일, 세종대왕은 역사에 길이 빛날 걸작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세종이 어떻게 한글을 만들었으며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단독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쓰여 있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의 일들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을 번역하고 해설서를 만드는 등의 작업에 참여한 것도 모두 훈민정음 창제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정말 혼자만의 힘으로 한글을 만든 것일까? 베일에 감춰진 한글 창제의 비밀과 관련해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죽산 안씨 일가의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 공주는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

가득 차 있으면 빈 곳도 있는 ‘소만’

보릿고개 - 이영도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여덟째로 ‘소만(小滿)’이다. 소만이라고 한 것은 이 무렵에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차기[滿] 때문인데 이때는 이른 모내기를 하며, 여러 가지 밭작물을 심는다. 소만에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 먹고 죽순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 먹는 것도 별미다. 이때 특별한 풍경은 온 천지가 푸르름으로 뒤덮이는 대신 대나무만큼은 ‘죽추(竹秋)’라 하여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다. “죽추(竹秋)”란 대나무가 새롭게 생기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느라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한글을 다시 일으킨 최세진

백조라 슬픈 미운 오리 새끼 최세진(崔世珍, 1468~1542)은 사역원정(司譯院正, 조선 시대에 외국어 번역 및 통역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사역원에 두었던 정삼품 관직) 최정발(崔正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중국어를 배운 최세진은 신분은 낮았지만(중인 계급) 외국어 능력으로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바로 이 점이 사대부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았다. 신분은 낮은데 능력이 뛰어나니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세진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연산군 때 최세진은 왕을 비방하는 익명의 투서를 쓴 범인으로 지목되어 누명을 뒤집어 쓸 위기에 처했다. 승지 권균이 그의 무죄를 입증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화를 면할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