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39

(얼레빗 제5031호) 원주 지광국사탑, 113년 만에 고향으로

지난 11월 12일 언론에는 “국보 ‘원주 법천사터 지광국사탑’이 1,975㎞ 긴 유랑 끝에 113년 만에 복원을 마치고 고향 땅에 우뚝 섰다.​”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승탑 전체에 걸쳐 코끼리 눈 무늬, 구름무늬, 넝쿨무늬, 불보살, 봉황, 신선, 구슬, 가릉빈가(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 등 화려한 무늬가 돋보이는 승탑입니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과 원주시는 오랜 유랑 생활을 끝내고 원래 자리였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터에 다시 세운 지광국사탑을 기려 복원 기념식을 연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승탑(僧塔)으로 평가받는 지광국사탑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처음 반출된 뒤 1,975㎞에 달하는 길고 긴 유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서울 명동(1911~1912)을 거쳐 일본으로 반출되었지만, ..

(얼레빗 제5012호) 99년 전 오늘 일제, 남산에 조선신궁 세워

99년 전인 오늘(1925년 10월 15일)은 서울 남산 중턱에 43만㎡ㆍ15개 건물로 ‘조선신궁’이 완공된 날인데 신궁은 신사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것입니다. 일제는 10월 13일 경성역에서 조선신궁에 놓을 신체(身體)를 일본으로부터 받아오는 열차가 도착하는 행사를 여는 등 조선신궁 완공에 맞춰 경성의 가장 큰 행사로 화려하게 기획하였기까지 하였지요. 조선신궁은 일 왕가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와 1912년에 죽은 명치왕을 모신다는 명목으로 세웠습니다. ▲ 일제가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조선총독부 자료사진) 기존에 남산 마루에 있던 국사당(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김과 동시에 개인 사당으로 격하시켜 버렸고, 고종이 만든 조선 첫 국립묘지 격인 장충단(1900년)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말..

(얼레빗 제4997호) 박재혁 의사, 104년 전 부산경찰서장 처단

104년 전 오늘(9월 14일)은 박재혁(朴載赫) 의사가 부산경찰서장을 처단한 날입니다. 박 의사는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김원봉 단장이 이끈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의열단은 암살 대상으로 조선총독과 고관, 군 장성, 친일파 거두 등 소위 7가살(七可殺)을 정하고, 파괴할 곳으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등을 정해 철저하게 응징하자고 결의하였으며 이를 행동에 옮긴 단체입니다. 이에 따른 박 의사는 같은 해 9월 13일 부산경찰서 파괴의 임무를 띠고 짐 속에 폭탄을 숨겨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왔습니다. 박 의사는 상하이를 떠나기 전, 부산경찰서장이 고서수집가라는 사실을 알아내, 고서상(古書商..

보존처리로 되살아난 독립운동 기록물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문화유산보존과학센터(센터장 박종서)는 지난 2022년부터 진행한 국가등록문화유산 《장효근 일기》와 《대동단결선언문서》의 보존처리를 끝냈다. 《장효근 일기》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장효근 선생이 1916년부터 1945년까지 작성한 일기로,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양력 달력 인쇄물인 의 지면을 일기장으로 활용하였다. 모두 30권 가운데 현재 3권(1925년, 1934년, 1937년)을 뺀 27권이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상과 국제 정세, 33인의 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 이후의 정황 등 독립운동과 관련한 기록이 있어 역사적 값어치를 인정받아 2018년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장효근(1867~1946): 제국신문(帝國新聞), 만세보(萬歲報) 등의 창간과 발행을 ..

(얼레빗 제4988호) 민족 언론의 자존심,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

1936년 8월 9일 열린 베를린 올림픽 본선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는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습니다. 일제는 당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이 두 선수의 출전을 막으려고 온갖 술수를 썼지만, 기록에서 현저히 뒤지는 일본 선수를 뽑을 수 없어 마지못해 조선인 선수를 뽑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일제와 일본어 발행 신문들은 일본인으로서 ’손 기테이‘를 일제히 칭송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가슴에 나라 잃은 한을 품고 혼을 불살라 이룬 조선인 손기정의 우승마저 일본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라며 민족지 언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여운형 사장의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8월 13일 자 신문에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은 뒤 자진 휴간을 선언했고, ..

(얼레빗 제4984호) 무궁화는 우리의 국화가 될 수 없다

지난 8월 12일 산림청은 “광복절 맞아 전국 곳곳 무궁화 축제 개최”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8월 18일까지 국립세종수목원, 수원시 영흥숲공원, 대전광역시 한밭수목원, 청주시 미동산수목원, 함평군 엑스포공원 등 온 나라 곳곳에서 다양한 품종의 무궁화를 전시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충청남도 태안군 천리포수목원은 무궁화 공예체험, 무궁화 OX퀴즈 등 다양한 체험거리를 제공하며 그동안 비공개됐던 무궁화품종보전원을 무료로 전면 개방한다는 소식입니다. 하지만, 경희대학교 법무대학원 강효백 교수는 그의 책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욱일기의 바탕인 무궁화, 우리 국화 될 수 없다.”라고 외칩니다. 강 교수는 ‘우리나라 옛시조 3,355수 가운데 단 한 수라도 무궁화를 노래했더라면’, ‘약 4,965만 자의 ..

《감사와 사죄의 기록, 나와 한국》 한국어판 나와

“나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하였습니다. 화학공업 회사였는데, 회사가 사용하는 전력을 만들기 위해 중국과 조선의 국경에 있는 압록강에, 당시 제일이라고 알려진 커다란 댐(수풍댐)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모두 일본 효고현 아시야(芦屋)에서 살았고, 아버지 혼자 현지에 파견을 나가 일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집은 윤택하게 살았습니다. 1945년 한국이 광복을 맞자, 아버지는 실직했고, 9인 가족의 생활은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1941년 태어나 일곱 형제의 막내였던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 가난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한국 사람을 지배하고 그 덕분에 집이 부유하다는 게 왠지 떳떳하지 못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인 하라다 교코(原田京子)..

(얼레빗 제4888호) 일제강점기 신문광고, ‘우리의 옷감ㆍ자랑’

1933년 4월 9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방직주식회사의 태극성 광목 광고는 “우리의 옷감, 우리의 자랑”이라고 내세웁니다. 이어서 “틀림없는 품질은 외품(外品)을 단연 능가! ...... 아 당당한 우리 제품. 우리의 자랑거리며 가장 좋은 우리의 옷감”이라고 광고합니다. 또 1927년 10월 24일 자 중외일보에 실렸던 동양염직소의 광고는 “우리 2천3백만 동포는 우리의 앞길을 생각하시고 좌의 물품(동양저, 동양견, 해동목, 동양직)을 추장하시옵소서”라고 합니다. ▲ 1933년 4월 9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방직주식회사의 태극성 광목 광고 이 광고들은 ‘우리 국산품’, ‘우리 동포의 옷’ 등의 표현을 써서 은연중에 일본을 외국으로 취급하고 조선을 독립국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 이..

(얼레빗 제4886호) 정인보, '오천년간 조선의 얼' 총독부가 압수

88년 전(1935년) 오늘(11월 29일) 정인보(鄭寅普, 1893~모름) 선생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논설 '오천년간(五千年間)의 조선의 얼'이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내선일체를 목표로 민족말살정책에 몰두했지요. 정인보 선생은 총독부가 조선을 영구 지배할 목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뿌리부터 왜곡하는 '조선반도사'를 편찬할 때 이에 맞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집필한 것입니다. ▲ 《조선사연구》를 펴내고 민족정신을 드높인 정인보 선생(국가보훈부 제공) 선생은 1912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ㆍ박은식(朴殷植)ㆍ신규식(申圭植)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ㆍ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을 하였지요. 그러다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귀..

상주 남장사 앞에서 본 귀한 벅수(석장승)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벅수와 장승이 있었다. 지금은 많은 이가 이 벅수와 장승을 혼동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벅수’는 주로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워져 있었는데, 밖에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었다. 특히 1600년 무렵 중국에서 발생해 조선으로 마구 밀려오는 돌림병과 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해 전설 속의 치우(蚩尤), 용, 또는 장수나 제왕의 표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했고 가슴에는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승은 역참제도에 의해 생긴 말로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그 역할은 '여기서부터 어디 어디다'라고 하는 표지 기능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유일하게 벅수와 장승 전문가인 황준구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여)장군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