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회 26

한글 위인 열전 - 우리글과 역사를 사랑한 권덕규

“조선은 예부터 국문이 있었으니 신지비사(神誌秘詞)는 그것이 어떤가는 알지 못하나… 세종 25년에 정음청을 궁중에 두고… 예전부터 내려온 문자를 정리하고 연구하고 골라 자모 28자를 정하여… 국민에게 반포하니 이것이 즉 훈민정음(즉 언문이라 함.)이라. 세계 문자 가운데 가장 신식의 것으로 동양의 알파벳식 문자로 그 정교함이 문자의 역사상 특별히 뛰어난 것이다.” - 권덕규의 ≪조선유기≫ 중에서 암흑 속에서도 빛났던 자긍심 권덕규는 1913년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모교와 중앙학교·중동학교에서 우리글과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주시경의 뒤를 잇는 국어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 뒤 조선어학회의 역사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는 ≪큰사전≫ 편찬에 참여..

집으로 한 독립운동, 건축왕 정세권

북촌한옥마을. 오다가다 한 번쯤 지나쳐 본 적이 있을 이곳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 일본인이 경성에 몰려와 살며 조선인들은 점점 외곽 변두리로 내몰리는 것을 염려한 건축왕 정세권이 한 평 두 평, 땅을 사들여 조선인들의 보금자리를 지켜낸 곳이다. 오늘날 보는 북촌한옥마을의 풍경은 거의 이 건축왕, 기농 정세권이 만들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건양사’라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살기 편하고 값싼 ‘조선집’, 곧 한옥을 대거 지어 보급했고, 덕분에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잠식해 오는 가운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정세권을 알고 있는 이들은 별로 없다. 큰 사업을 일군 자본가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독립운동을 하다 1942년 일제에 체포, 갖은 고문을 받고 건축 면허와 재..

새털과 쇠털

우리는 흔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날을 비유해서 ‘새털같이 많은 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새털’은 ‘쇠털’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소의 뿔을 ‘쇠뿔’이라 하듯이 소의 털을 ‘쇠털’이라 하는데, 그 쇠털만큼이나 많은 날을 가리킬 때 우리 한아비들은 ‘쇠털같이 많은 날’이라고 비유적으로 써 왔다. ‘쇠털’의 발음이 ‘새털’과 비슷해서 잘못 전해진 것인데, 1957년에 한글학회에서 펴낸 『큰사전』에 “쇠털같이 많다.”라는 말이 오른 이래로 모든 국어사전에 “새털같이 많은 날”이 아닌 “쇠털같이 많은 날”이 올라 있다. 그러므로 “새털 같은 날”이나 “새털같이 하고많은 날”은 “쇠털 같은 날”, “쇠털같이 하고많은 날”로 써야 옳다. 그렇다고 ‘새털같이’라는 표현이 모든 경우에 잘못된 것은 ..

“맑순 주세요.”

음식점에 가면 차림표에 “대구지리”, “복지리” 따위로 써 붙인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 생선국을 “매운탕”이라 하는 데 비하여, 고춧가루를 쓰지 않은 생선국을 그렇게 일컫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리(ちり)”는 일제강점기 이후 아직도 우리말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일본어 낱말이다. 몇몇 책에서는 “지리”를 대신할 우리 낱말로 “백숙”을 들어 놓았다. 양념하지 않은 채로, 곧 하얀 채로 익혔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대구지리”나 “복지리”를 “대구백숙, 복백숙”이라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것은 달걀 백숙과 같은 음식이 아니라 국이기 때문이다. 이 음식들은 매운탕과 상대되는 것이므로 “지리”란 말을 “맑은탕”이나 “싱건탕”으로 대신하는 것이 좋겠다. 국립국어원에..

답 그리고 정답

한글학회는 월간 [한글 새소식]과 페이스북 ‘한글학회’ 마당에서 다달이 우리말 알아맞히기 문제를 내고 있다. 문제와 함께 제시하는 귀띔을 읽기만 하면 누구나 풀 수 있도록 했지만, 그렇다고 꼭 ‘정답’만을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읽고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보낼 수 있다. 한글학회 담당자는 접수된 ‘답’들 가운데 ‘정답’을 맞힌 이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상품을 준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에서는 시청자와 청취자를 위한 퀴즈 문제를 자주 내고 있다. 그런데 퀴즈를 내면서 진행자가 하는 말 가운데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이 문제의 정답을 아시는 분은 다음 번호로 곧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흔히 무심코 받아들이는 말이지만, 이 표현에서 ‘정답’이라고 하..

‘이력’과 ‘노총’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며 여행자의 계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취업 철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다.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의 문을 두드리는 계절이다. 취업을 위한 첫 준비가 바로 이력서를 쓰는 것이다. ‘이력’은 자기가 겪어 지내온 학업과 경력의 발자취이고, ‘이력서’는 이 이력을 적은 서류를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자말 ‘이력’ 말고 순 우리말 가운데도 ‘이력’이 있다. 순 우리말 ‘이력’은 “많이 겪어 보아서 얻게 된 슬기”를 뜻한다. 가령, “이젠 이 장사에도 웬만큼 이력이 생겼다.”와 같이 어떤 일에 ‘이력이 나다’, ‘이력이 붙다’처럼 사용하는 말이다. 이럴 때 쓰는 ‘이력’과 한자말 ‘이력’은 전혀 다른 말이니 잘 구별해야 한다. 한글학회는 한자말 ‘이력’을..

[토박이말 살리기]1-43 다붓하다

오늘 알려 드릴 토박이말은 '다붓하다'입니다. 이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매우 가깝게 붙어 있다'라고 풀이를 하고 있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 토박이말 사전'에는 '떨어진 사이가 바투 붙은 듯하다'라고 풀이를 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바투'가 '두 일몬(사물) 사이가 꽤 가깝게'라는 뜻이니까 풀이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말을 쓴 사람이 없었는지 보기월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알고 나면 쓸 일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요즘 빛무리 한아홉(코로나 19) 때문에 힘들어 하는 요즘 '드물게 지내기(사회적 거리 두기)'를 자주 듣게 되고 말하게 됩니다. '가깝게 붙어 있지 마라'고 할 때 '다붓하지 마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

주기와 주년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그리 호평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는 ‘아이들과 함께 볼 만한 영화’로 흥행을 이루며 개봉 20일 만에 270만 관객을 넘어섰다. 일반에 덜 알려졌던 조선어학회의 일제강점기 활동을 조금이나마 비추어낸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성과이다. 조선어학회 중심인물 가운데 한결 김윤경 선생이 있다. 김윤경 선생은 주시경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서 조선어학회(뒷날 한글학회)와 평생을 함께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겪은 선생이 오는 2월 3일, 50주기를 맞이한다. 어떤 특정한 일이 일어난 때를 기리어 1년씩 기준하여 헤아리는 단위로 ‘주년’과 ‘주기’가 있다. 해마다 돌아오는 그 날을 순 우리말로 ‘돌’이라고 하는데, 이 돌이 돌아온 해를 바로 ‘주..

다모토리

다모토리라고 하면 언뜻 듣기에는 일본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글학회에서 펴낸 에 실려 있는 순 우리말이다. 이 사전에는 다모토리를 “큰 잔으로 파는 소주, 또는 그런 술을 마시는 일”이라고 올려놓았는데, 국립국어원에서 구축하고 있는 에서는 다모토리가 주로 함경북도 지방에서 ‘선술’의 뜻으로 쓰이던 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예전에는 큰 술잔으로 마시는 ‘대폿술’이 흔했다. 술을 별 안주 없이 큰 그릇에 따라 마시는 것을 ‘대포 한잔 한다’고 했고, 막걸리를 큰 잔에 담아 파는 술집을 대폿집이라고 했었다. 아마 북쪽 지방에서는 소주를 큰 잔에 담아 파는 집을 다모토릿집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일본의 전통적인 다찌노미나 이자카야처럼, 다모토릿집은 옛 시대에 우리 한아비들의 시름을 달래주던 선술집이 아니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