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회 26

주시경의 표기 이론과 『국어문법』의 의미

‘국문의 어릿광대’ 『국문강의』(1906)의 발문에서 주시경은 “나는 다만 국문의 한 어릿광대 노릇이나 하려는 것이니, 고명하신 분들이 앞으로 말과 글을 연구하고 수정하여 좋은 도구로 만들어주시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랬다. 그가 바랐던 것은 그저 ‘국문의 어릿광대’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국문’, ‘고명하신 분들’에게는 더욱 더 외면당하던 ‘국문’이 자신의 어릿광대짓으로나마 그분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면, 그리하여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자신은 족하다는 것이었다. ‘국문의 어릿광대 노릇이나 하겠다’는 주시경의 말은 그러나 그저 겸손의 표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아마 당시에 그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국어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될지는 꿈에도 생..

주시경의 유산

별이 지다 국문 연구, 말모이 편찬, 한글 강습 등으로 불철주야 장안을 누비던 주시경이 1914년 7월 27일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제자 김윤경은 주시경 선생은 1911년 일제가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사건의 여파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망명을 결심하고, 방학 때에 고향 부모를 찾아뵈었으며, 서울로 돌아와 떠날 준비를 하던 중에 ‘체증’으로 돌아가셨다고 썼다(김윤경, 「주시경 선생 전기」, 『한글』 126(1960)). 돌연한 스승의 죽음에 제자들은 통곡했다. 김두봉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라며 슬퍼했고, 스승의 부탁으로 동래군 동명학교 하기강습회에서 수업을 하던 중 부음을 들은 최현배는 강습생들과 함께 대성통곡했다. 생전의 주시경은 상동청년학원을 비롯해 공옥학..

실천적 지식인 주시경 선생의 업적

세종이 1443년 12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많은 책을 훈민정음으로 펴냈다. 특히 의서ㆍ농서 등 백성들의 실생활에 필요한 책과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한 교훈서 등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백성ㆍ국민을 위하고자 하는 정책에는 기득권 세력의 거센 도전이 따른다. 당시 최만리 등 조정의 중신들과 각지의 유생들이 드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의 예에 어긋나며,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는 나라는 오랑캐들뿐’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군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였지만 지배층에서는 19세기까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비하하고, 어린이와 부녀자들의 글로 치부하였다. 말(언어)은 한국어로 하면서 글(씨)은 한문으로 쓰는 실정이었..

(얼레빗 3923호) 훈민정음 반포를 기린 가갸날 그리고 한글날

한국문화편지 3923호 (2018년 10월 10일 발행) 훈민정음 반포를 기린 가갸날 그리고 한글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2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글을 만들어 세상에 반포한 것을 맨 처음 기린 날은 1926년의 일입니다. 그때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지금의 한글학회)가 《세종실록(世..

9월 5일 -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사건을 아시나요

1921년 12월 3일 국어학과 국어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 임경재, 최두선, 이승규, 이규방, 권덕규, 장지영, 신명균을 포함한 10여 명이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조선어연구회’라는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 총회에서 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