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 9

민족 계몽을 꿈꾼 ‘대한민보(大韓民報)’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대한제국(1897~1910) 시기는 근대의 희망과 아픔이 공존했던 시기였습니다. 침략적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에 우리나라로 침탈해 들어오는 외세를 막아내기 위해 무력투쟁(武力鬪爭)을 비롯한 여러 자강(自强)과 계몽운동(啓蒙運動)을 각계각층에서 펼쳤으나, 끝내는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일제강점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에 근대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는 외세의 위협이 날로 늘어나는 때였기 때문에, 이때의 근대 문물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방편으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신문(新聞)’입니다. 그렇게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1884)』였고, 그 후로 『한성주보(漢城週報, 1886~1888)』, 『독립신문(獨..

100년 전 우리말 풍경 - 100년 전 신어

새로운 문물은 이를 지칭하는 말과 함께 등장한다. 개항 이후 외래 문물이 물밀 듯 밀려오며 이를 나타내기 위한 수많은 근대 신어가 생겨났다. 그중에는 그 쓰임이 계속 유지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도 있지만, 짧은 기간 쓰이다가 사라진 것도 적지 않다. 쌍안경을 뜻하는 ‘쌍통(雙筒)’, 벽돌을 뜻하는 ‘연화석(煉化石)’, 오르골을 뜻하는 ‘팔음합(八音盒)’, 기압계를 뜻하는 ‘청우의(晴雨儀)’ 등은 개항 초기 문헌에 쓰였지만 이내 사라진 단어들이다. 반면, ‘연필(鉛筆)’, ‘완구(玩具)’, ‘신문지(新聞紙)’ 등의 근대 신어는 일상어로 자리 잡아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 1927년 5월 4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가람 이병기의 글: ‘뿡뿡이차(자동차)’, ‘땅ㅅ감(토메이토)’, ‘불수레(긔차)’ 등 ..

100년 전 우리말 풍경 - 신소설에 그려진 근대의 신문 독자들

20세기 초에 나온 신소설에는 당대인들의 일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신문을 읽는 모습도 그중 하나이다. 신소설의 이야기 속에서 신문은 인물의 정체를 암시하기도 했고, 사건을 유발하거나 반전을 가져오는 극적 장치로 활용되기도 했다. 신문을 읽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당대의 최첨단 매체였던 신문이 개인의 일상을 파고든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1883년 『한성순보』의 창간을 필두로 1886년 『한성주보』, 1896년 『독립신문』, 1898년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1904년 『대한매일신보』, 1906년 『만세보』 등 다양한 신문이 간행되었다. ▲ 1898. 5. 7. 『독립신문』(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이 시기 신문은 대개 4면으로 발행되었는데, 1면에는 정치 문제..

100년 전 우리말 풍경 - 개항 직후, 어떤 물건들이 수입되었을까?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 변화는 보통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100년 전 한국어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전례 없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언어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특히 어휘는 사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역이다. 개항 이후 서구의 신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일상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한국어의 어휘 체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개항 직후의 수입품 목록은 1883년에 작성된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 관세 규정과 같은 해 조선과 영국 간에 체결된 통상조약의 관세 규정을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관세 규정은 수입품에 대한 것과 수출품에 대한 것으로 나뉘는데, ‘수입품’이나 ‘수출품’이라는 용어 대신 항구로 들어오는 상품과 나가는 상품이라는 뜻으로 ‘진구화(進口貨)’, ‘출구화(出口..

(얼레빗 4491호) 발해 외면하는 통일신라 대신 남북국시대로

“발해사에 따르면 서쪽으로 거란에게 책망하여 돌려받고 북쪽으로 여진에게 책망하여 돌려받아 우리 강토를 잃지 않고 동양 세계에 일대 강국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거늘, 바로 고려의 문인 학자들이 이를 타인의 강토로 등한시하여 5경 15부의 빛나는 판도를 이역에 빠지게 하고 동남쪽 한 모퉁이로 축소되어 약소한 나라를 스스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 남북국시대 강역도 ⓒ KJS615 / wikipedia | CC BY-SA 3.0 이 글은 〈제국신문〉과 함께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였던 의 1910년 4월 28자 논설 '발해고를 읽다' 일부입니다. 발해(渤海)는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으로 공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의 유민들과 그 지역의 또 다른 한민족 계열의 사람들이 고구려의 영토..

(얼레빗 4471호) 오늘이여, 목 놓아 통곡하노라

“오호라. 개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이익을 추구하고, 위협에 겁을 먹어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었으니,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국민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가운데 줄임)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이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이는 1905년 오늘(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장지연 선생이 에 〈오늘이여, 목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라고 쓴 논설의 일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우리 겨레는 함께 통분해 하며, 목놓아 울었습니다. ▲ 에 장지연 선생이 쓴 “오늘이여, 목 놓아 통곡하노라” 논설 오늘은 제81주년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1939년 11월 2..

(얼레빗 4280호)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세수한 신채호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고 합니다. 선생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이면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특히 일본이 지배하는 땅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얼레빗 4277호) 조선 첫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

“농상공부길(農商工部通り)에 신축 낙성한 경성고등연예관에서 (2월) 18일 관민 수백 명을 초대하여 활동사진 개장을 피로한다.” 이는 1910년 2월 18일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이 경성고등연예관(高等演藝館)은 일본인 와타나베가 세운 조선에 처음 등장한 영화관입니다. 경성고등연예관..

(얼레빗 4172호) 97년 전 오늘 애꾸눈 신규식 독립지사 숨져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썼으며, 참정ㆍ외무대신을 지낸 민영환ㆍ원임의정대신 조병세ㆍ 이조참판을 지낸 홍만식 등은 자결했지요. 이렇게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