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선생(1867. 3. 17.~ 1932. 11. 17.)은 국외 항일 운동의 전반에 참여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로 기억되는 독립운동가이다. 우정사업본부는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당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명문가인 백사 이항복 가문의 후손으로, 열린 사상과 선각자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다. 우당은 1898년 독립 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 계몽 운동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운동을 펼치다가 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 또한, 만주에 한국 최초의 신학문 민족 교육 기관인 `서전서숙` 설립에도 참여했다. 1906년에는 민족 교육 계몽 운동과 무장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던 `신민회`의 창립 구성원으로 활동했으며,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우당과 여섯 형제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재산을 처분한뒤 현재 가치로 6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가지고 온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그리고 1911년 이주 동포 정착을 돕고 농업을 지도하기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고, 같은 해 독립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해 독립 투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우당은 1918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하여 고종의 국외 망명을 계획했으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베이징으로 다시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그러나 임시 정부의 파벌과 분열상을 보고 신채호와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가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하고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에는 중국 가지에 있던 동지들을 상해로 집결시켜 `항일 구국 연맹`을 조직했고, 1932년 중국 국민당과 교섭해 자금과 무기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해 11월, 만주에서 한중 연합 항일 투쟁을 지도하기 위하여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가던 중 비밀이 누설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다 65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명문가 자손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 모든 것을 바친 우당 이회영 선생, 그의 숭고한 정신은 우리 모두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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