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리는 피를 뽑아 죽이는 일인데 피사리라고 하니 ‘피살이’, 즉 ‘피를 살린다’는 말로 들려 헷갈린다. ‘-사리’가 뒤에 붙은 말 가운데 그런 사례가 있나 찾아봐도 없다. 다만 벗겨 놓은 싸리 껍질을 뜻하는 비사리가 줄기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유인원(類人猿)과 유원인(類猿人)도 헷갈린다. 글자 그대로 유인원은 ‘사람을 닮은 원숭이’, 즉 고릴라, 침팬지 같은 것들이고, 유원인은 ‘원숭이를 닮은 사람’인데, 우리말로는 미사리라고 한다. 사전의 뜻풀이를 그대로 전하면 ‘산 속에서 풀뿌리나 나뭇잎, 열매 따위를 먹고 사는, 몸에 털이 많이 난 자연의 사람’이라고 한다. 과문하여 떠오른 것이 타잔밖에 없다. 비록 몸에 털이 많이 난 타잔은 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미사리는 삿갓이나 방갓, 전모 같은 것의 밑에 대어 머리에 쓰게 된 둥근 테두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는 접사리라고도 하는데, 농촌에서 모내기할 때 쓰던 비옷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목사리는 개나 소 같은 짐승의 목에 두르는 굴레를 뜻하는 말이다.
아사리(阿闍梨)라는 말도 있다.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지도하여 그 모범이 될 수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좋은 얘기다. 그런데 ‘아사리판’은 어찌 된 판인가. 사전에도 나오지 않지만 대충 ‘다툼으로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곳이나 그런 상태’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예를 들어 영화 <왕의 남자>에 나오는 대사를 보자. “네 놈 두 눈이 멀어 뵈는 게 없으니 세상을 이리 아사리판으로 만들어놨구나!” 이정환의 소설 <샛강>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네가 죽냐 내가 죽냐 하는 아사리판에 다른 사람의 생명은 알아 모셔서 어쩌겠냐는 세월이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아사리와 아사리판은 도무지 동이 닿지 않는다. 아사리판의 아사리의 말밑을 ‘빼앗다’라는 뜻의 ‘앗다’에서 찾아 ‘빼앗을 사람’이라는 뜻의 ‘앗을이’가 아사리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 내 생각에는 ‘아수라(阿修羅)판’이 의미나 소리 측면에서 아사리판의 말밑에 가까운 것 같다.
피사리 (명) 농작물에 섞여 자란 피를 뽑아내는 일.
쓰임의 예 – 비가 그치고 나면 무엇보다도 먼저 피사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한수산의 소설 『유민』에서)
- 모내고 피사리하고 나면 강에 가 천렵하고…. (한수산의 소설 『부초』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목사리 – 개나 소 같은 짐승의 목에 두르는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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