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가 일어났던 그해 태어나 지금까지 마흔 몇 해를 엄벙뗑 살아왔다”고 나는 내 책의 날개에 실린 자기소개에 적었다. 여기에서 나는 ‘엄벙뗑’이라는 말을 ‘어영부영’이나 ‘얼렁뚱땅’과 같은 뜻일 것으로 생각하고 썼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니 ‘어영부영’은 ‘뚜렷하거나 적극적인 의지가 없이 되는대로 행동하는 모양’, ‘얼렁뚱땅’은 ‘엉너리를 부려 얼김에 슬쩍 남을 속여 넘기는 모양’이라고 풀이돼 있다. 물론 나는 ‘남을 속여 넘기며 살아왔다’는 뜻이 아니라 ‘어영부영 되는대로 살아왔다’는 뜻에서 “엄벙뗑 살아왔다”고 쓴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엄벙뗑’은 어떻게 풀이돼 있을까. 별다른 뜻풀이 없이 ‘얼렁뚱땅’의 동의어로 처리돼 있고, 이무영(李無影)의 소설 『농민(農民)』에서 뽑아낸 다음과 같은 예문이 실려 있다. ‘농군들은 우수, 경칩, 춘분, 청명 이렇게 풀풀 날아 들어도 봄보리 때가 어느 땐지도 모르고 엄벙뗑 보내다가 떡 한식이 닥쳐야만 비로소 “어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예문의 ‘엄벙뗑’ 대신 쓰일 낱말은 아무리 봐도 ‘얼렁뚱땅’이 아니라 ‘어영부영’이다. 이쯤 되면 국어사전을 어영부영, 아니면 얼렁뚱땅 만든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얼렁뚱땅’은 ‘얼렁거리다’에서 파생된 말이고, 작은말은 ‘알랑똥땅’이다.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환심을 사려고 더럽게 자꾸 아첨을 떠는 것을 ‘얼렁거린다’고 하고, 얼렁거리는 사람을 얼렁쇠라고 한다. 얼렁수는 얼렁뚱땅하여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수단을 가리킨다. 그런데 얼렁질, 얼렁가래, 얼렁장사 같은 말들은 ‘얼렁거리다’가 아니라 ‘어우르다’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실 끝에 돌을 매어 서로 걸고 당겨서 어느 실이 더 질긴가를 겨루는 장난이 얼렁질, 둘을 나란히 어울러 겹으로 쓰는 가래가 얼렁가래, 여럿이 밑천을 어울러서 하는 장사가 얼렁장사다. ‘어우르다’는 ‘여럿을 모아 한 덩어리나 한판이 되게 하다’라는 뜻인데, ‘남녀가 잠을 자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엄벙뗑하다 (동) 엉너리를 부려 얼김에 슬쩍 남을 속여 넘기다.
쓰임의 예 ★ 철수 자신은 남을 속이지 않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속이고, 그리고 엄벙뗑하고 한평생을 지내 가려는 심사인지도 몰랐다…. (박태원의 소설 『옆집 색시』에서)
★ 전에는 입에다가 대지도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집안일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을 엄벙뗑하는 가운데 보내게 되었다. (나도향의 소설 『어머니』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얼렁수 – 얼렁뚱하여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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