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가리나 낟가리의 가리는 ‘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장작 따위를 차곡차곡 쌓은 더미나 그것을 세는 단위’를 뜻한다. 한 가리는 스무 단이다. 이 ‘가리’에 어미 ‘-다’를 붙이면 ‘가리를 만들다’라는 뜻의 ‘가리다’가 된다. 볏가리는 음력 정월 보름날 아침에 경상도에서 행하는 민속의 이름이기도 하다. 풍년을 비는 뜻에서 장대 위에 짚 꾸러미를 달아 가늘게 쪼갠 대오리를 늘이고, 거기에 벼 이삭을 상징하는 흰 종이를 달아 둔다고 하는데, 보름대나 오지붕이라고도 한다. 이 역시 사전에 이름만 남아 있는 우리 농경사회의 흔적이다. 낟가리는 한자말로 곡식 곡(穀), 쌓을 퇴(堆) 자를 써서 곡퇴라고 하는데, 북한에는 “낟가리에 불 질러 놓고 손발 쬐일 놈”이라는 속담이 있다. 남이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작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욕하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로맹 가리나 말가리의 가리(가리새), 볏가리 낟가리의 가리 말고도 세상(말들의 세상인 국어사전)에는 수많은 가리들이 있다. 삼을 벗길 때, 널어 말리려고 몇 꼭지씩 한데 묶은 것도 가리라고 한다. 대오리를 엮어서 밑이 없이 통발 비슷하게 만들어 강이나 냇물에서 물고기를 잡는 기구의 이름도 가리다. 가리는 또 주둥이와 함께 입의 속어인 아가리의 준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가리 닥쳐” 대신 “가리 닥쳐”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본딧말이든 준말이든 이런 말은 안 쓰는 것이 좋다. 잘못하다간 ‘가리’에 타박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가리는 조류인 노랑부리저어새, 어류인 보굴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보굴치는 길이가 두 뼘이 안 되는 작은 민어이므로, 가리가 가리를 잡아먹는 동족상잔(자세히는 동음이의어 상잔)의 비극적인 사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길이가 세 뼘쯤 되는 민어는 어스래기라고 한다.
볏가리 (명) 벼를 베어서 가려 놓거나 볏단을 차곡차곡 쌓은 더미.
쓰임의 예 ★ 파르티잔들은… 논 한가운데 쌓아 놓은 볏가리 속에 숨겨 놓은 곶감을 여러 접 발견했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가리 - 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장작 따위를 차곡차곡 쌓은 더미나 그것을 세는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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