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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2) 시호, 전호, 능호

튼씩이 2022. 5. 4. 12:53

3) 시호


시호(諡號)는 국왕이 사망한 후 살아있을 때의 언행을 참조하여 정하는 이름이다. 국왕의 시호에는 신하들이 의논하여 올리는 시호와 중국 황제가 정하여 내리는 시호가 있었다. 신하들이 올리는 시호는 국왕이 사망하고 5일이 지난 후 입관 (入棺)을 하고 나서 의논하였다. 시호의 글자 수는 대개 8자였고, 글자 하나하나에 국왕의 일생을 평가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에 정조가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7월 6일에 의정부와 관각(館閣)의 관리들이 정조의 시호, 묘호, 전호, 능호를 정하여 올렸다. 시호는 문성무열 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 묘호는 정종(正宗), 전호는 효원 (孝元), 능호는 건릉(健陵)이었다. 시호는 글자별로 뜻이 있었다. 경천위지(經天緯 地)를 문(文), 예악명구(禮樂明具)를 성(成), 보대정공(保大定功)을 무(武), 병덕준업 (秉德遵業)을 열(烈), 궁리진성(窮理盡性)을 성(聖), 시인복의(施仁服義)를 인(仁), 이정지화(履正志和)를 장(莊), 계지성사(繼志成事)를 효(孝)라 하였다. 묘호의 정(正) 은 이정복지(以正服之)의 뜻이었다.

 

국왕의 시호는 여덟 글자가 원칙이나 태조는 ‘성문신무(聖文神武)’ 정종은 ‘온인순효(溫仁順孝)’라는 네 글자만 받았다. 숙종은 태조에게 ‘정의광덕(正義光德)’, 정종에게 ‘의문장무(懿文莊武)’라는 네 글자를 추가로 올려 여덟 글자의 시호로 만들었다. 태조의 시호에서 ‘정의(正義)’는 위화도 회군을 춘추의 의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시호를 바꿀 때에는 시호도감의궤가 작성되었다.

 

국왕의 시호가 결정되면 이를 기록한 옥책과 금보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 황제가 내린 시호는 옥책에 표시하지 않았다.

 

 

4) 전호


전호(殿號)는 국상이 있을 때 빈전(殯殿), 혼전(魂殿), 국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두루 사용하던 이름이다. 빈전은 국왕과 왕비가 사망한 후 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모신 전각이며, 혼전은 국왕과 왕비의 국장을 치른 뒤 삼년상을 지내는 동안 그 신주를 모신 전각이다.

 

 

5) 능호


능호(陵號)는 국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안치한 무덤의 이름이다. 능호는 국왕이 사망한 후 여러 가지 이름을 정할 때 함께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