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문과학
윤 용 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
예로부터 하늘의 변화를 하늘의 뜻이거나 하늘의 명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옛 사람들은 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그래서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하여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깨닫고 하늘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농경 국가로서 비와 바람 등 천기의 변화가 지대한 관심사 중의 하나여서 천문 관측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하늘의 변화는 왕실과 백성들의 평안과 직결되는 신의 뜻이라고 여겨 항상 주의 깊게 하늘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과학사는 천문과학과 함께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청동기시대부터 하늘을 관측해 다양한 기록을 남겨 왔으며 삼국 시대와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높은 수준의 천문과학을 발전시켰다.
조선 개국 이후 천문학은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세종 때에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고려의 서운관은 조선 시대에도 천문·지리·기상 관측 등을 담당하는데 세종 16년(1434)에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꾸어 역법 연구와 활발한 천문의기 제작은 물론 여러 천문 관련 서적을 발행하며 조선의 천문학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 인문강좌인 조선의 천문과학에서는 조선 세종 때 과학기술을 이끌었던 스스로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시보 천문시계인‘보루각 자격루(報漏閣 自擊漏)’, ‘흠경각 옥루(欽敬閣 玉漏)’, ‘혼천시계(渾天時計)’,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公衆) 해시계인‘앙부일구(仰釜日晷)’, 낮에는 해를 관측하고 밤에는 별을 관측하여 시각을 알 수 있게 한 주야 겸용 시계로, 세종 시대에 발명한 독창적인 천문의기인‘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비가 내리는 자연 현상을 기기(機器)를 써서 수량으로 측정하는 과학 방법이 세계에서 처음 시작되는 그야말로 기상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문종이 고안하여 발명한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測雨器)’ 등의 과학문화재에 담긴 과학원리와 우수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과기정통부 우정사업본부는 2021년 4월 제54회 과학의 달을 맞아 조선의 우수한 천문과학을 뒤돌아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의 천문과학’ 기념우표를 발행한바 있다.
1. 자동시보 천문시계 ‘보루각 자격루’,‘흠경각 옥루’, ‘혼천시계
1) 제어시스템의 극치이자 아날로그․ 디지털 변환기‘보루각 자격루’
“천년의 긴 세월은 일각(一刻)의 틀리지 아니함에서 비롯하고, 모든 공적의 빛
남은 촌음(寸陰)을 헛되게 하지 아니하는 데에 말미암는 까닭으로...,”.『세종실
록』의 김빈(金鑌)이 지은 보루각명병서(報漏閣銘幷序)에 보이는 시간의 소중함을 나타낸 대목이다.
물시계는 해시계 다음으로 가장 오래 된 시계로 해가 뜨지 않는 흐린 날이나 밤중에도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일찍부터 공식적인 시계로 정착하였다. 물시계의 제작은 조선 세종 때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매우 정교한 자동 시보장치가 붙은 자격루가 바로 그것이다.
자격루는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시간을 계측하고 시보장치로 시각을 알리는 자동물시계로 세종 16년(1434) 6월에 장영실(蔣英實), 김빈 등이 창제한 보루각루(報漏閣漏)에서 유래하며 국가의 표준계시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자격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최근까지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중종 31년(1536년)에 새롭게 만든 자격루로 19세기 말까지 표준시계로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양화당 옆 화원에 전시하다가 1938년 이왕가 미술관을 개관하면서 덕수궁에 이전 설치되어 야외에서 전시되다가 2020년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세종실록 속의 자격루는 물을 담아 흘려내려 그릇인 파수호(播水壺) 4개, 물 받는 그릇인 수수호(受水壺) 2개, 부전(浮箭, 살대), 동력전달장치와 시보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자격루의 작동원리는 파수호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 살대[浮箭]가 떠오르면 부력(浮力, 액체 속에 있는 물체인 살대가 그 살대에 작용하는 압력에 의하여 중력에 반하여 위로 뜨려는 힘으로 물체에 작용하는 부력이 중력보다 크면 뜬다)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해지고, 시각마다 쇠구슬이 굴러 내리면서 자격장치로 들어가게 된다. 다시 말해 물이 수수호에 차고 살대인 거북이가 떠올라 일정 높이에 도달하여 미리 장치해 놓은 격발 장치를 건드리기만 하면 쇠구슬이 굴러 내리고, 그 쇠구슬은 다른 장치들을 건드려서 여러 장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자격 장치로 흘러 들어간 청동 쇠구슬로 인한 동력이 내부장치를 거치면서 나무로 된 인형 3구가 종과 북·징을 쳐서 시보장치를 움직여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도록 구성되어있다. 나무인형 둘레에는 12신을 배치하여 1시부터 12시의 시각을 알리도록 하였다.
자격루의 구성을 보면, 일정하게 유량을 공급하는 유량제어기구, 증가하는 수위를 시각신호로 변환하는 살대-구슬방출기구, 작은 구슬을 이용하여 시보장치를 작동시킬 에너지를 발생하는 큰 구슬 방출기구, 십이시(十二時)를 청각과 십이지신(十二支神)의 교대로 시각적으로 알려주는 시(時)기구, 밤시간(五更點)을 북과 징으로 청각으로 시보하는 경점(更點)기구 등 복합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격루 동작의 원동력은 부력과 운동에너지이다. 부력에 의해 떠오른 살대로 얻은 에너지를 쇠구슬의 낙하에 의한 운동에너지로 바꾸어 시보장치를 작동시킬 추진력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연속적인 물의 흐름인 아날로그 신호를 정해진 시간 간격에 따라 불연속 신호인 디지털 신호로 바꾸어 나타낸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물시계는 위치 제어시스템, 살대-구슬낙하기구는 아날로그․ 디지털 변환기, 큰 구슬 방출기구는 순서 제어식 동력증폭기, 시(時) 기구는 시각 및 청각 시보장치로 모델링 할 수 있다.
자격루는 세종대왕의 인본사상과 과학정신이 배어있는 창조물로 우리나라는 물론 15세기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하이테크기술로서 한국인의 과학창조성과 우수성을 상징하는 발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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