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선의 초정밀 과학 기술 ‘혼천시계’
국보 230호인 ‘혼천 시계’는 조선 현종 10년(1669)에 천문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송이영이 만든 천문 시계로, 서양식 자명종(自鳴鐘)의 원리와 동양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혼천의(渾天儀)를 결합해 만든 것으로 천체 운행과 시간을 알려 주는 과학 문화재이다.
이 혼천시계는 길이 120cm, 높이 98cm, 두께 52.3cm 크기의 나무상자인 궤(시계 장치)와 혼천의(혼천의는 해와 달, 5행성인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의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 기기)로 구성되어 있다.
혼천의에는 태양 운행 장치와 달 운행 장치가 있어 천구상의 천체 운동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으며, 혼천의의 중심에 위치한 지구의(地球儀, 지름 약 8.9cm)에는 당시 정밀한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를 적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혼천의 중심의 지구의가 둥글다는 점이다. 당시 유학자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고 하는 천원지방설을 믿고 있었던 시기임에 비추어 대단히 놀라운 이론을 적용한 것이다. 따라서 몇몇 과학자들이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해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천문 과학에 대한 지식 체계를 갖고 있었기에 혼천시계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혼천의의 북극 쪽의 축은 시계 장치와 톱니바퀴(동력 기어)로 연결되어 있는데, 중심에 있는 지구의는 남북극을 축으로 하여 하루에 한 번 회전하게 설계되어 있다.
시계 장치(시간 지속 장치, 시간 지시 장치, 구슬 신호 발생 장치, 타종 장치로 구성, 아래 그림 참조)에는 12지 시패(時牌, 자시, 축시, 인시 등 글자로 표현) 인형으로 시간을 알려 주고, 타종을 위한 장치가 있어 조선 초기의 자격루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다. 시계 장치의 구슬 신호 발생 장치에서는 오늘날의 1시간 간격으로 쇠구슬을 떨어뜨려 신호를 보내 주며, 구슬 신호에 따라 타종 장치에 달려있는 작은 막대기가 종을 치도록 되어 있다. 또한 혼천시계의 시간 지속 장치에는 서양의 과학자인 호이헨스가 1657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진자시계를 응용한 시스템이 들어 있다.
혼천시계의 동력 발생은 2개의 추 운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앞에 있는 하나의 추는 주동력 장치로서 시간 지속 장치에 매달려 있는데, 시간 지시 장치와 구슬신호 발생 장치 그리고 혼천의로 동력을 전달한다. 시간 지시 장치(시간을 시각적으로 알려 주는 장치)는 12시패로 시간을 알려 주고, 구슬 신호 발생 장치(쇠구슬을 이용하여 타종 신호를 발생시키는 장치)는 구슬 주걱으로 들어 올린 쇠구슬을 떨어뜨려 신호를 발생시킨다. 또 다른 추는 타종 장치(시간에 따라서 종을 울리는 장치)와 연결되어 있어 구슬 신호 발생 장치로부터 발생한 신호로 매시간 타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렇듯이 혼천시계의 동력원은 추(분동, weight)를 이용하는 것으로, 추력의 힘을 일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탈진(脫進) 장치(진자의 운행에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간격으로 톱니 기어를 풀어주는 장치로 일종의 속도 조절 기구)와 진자(振子) 장치를 두었다. 보통 기계 시계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태엽(mainspring)이나 분동(weight)을 감아야 한다. 이것으로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이다. 혼천시계는 분동 즉, 추를 사용하여 에너지를 발생시켰다.
서양에서는 1583년 G. 갈릴레이(Galileo Galilei)에 의해 진자의 등시성이 발견되자 네덜란드의 과학자 C. 호이헨스(Christiaan Huygens)는 이것을 시계에 이용하여 1657년 최초의 진자 시계를 완성하였다.
이와 견주어 볼 때 조선의 진자를 이용한 자명종 제작 기술의 도입과 수용이 상당히 빨랐음을 알 수 있는데, 호이헨스가 진자시계를 만들어 낸지 단 13년만의일이다. 이렇듯이 빠른 신기술의 적용은 당시 조선의 전통적인 시계 기술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였다고 판단된다.
서양의 자명종 도입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인조실록』의 1631년(인조 9년) 7월에 처음 등장하는데, 정두원(鄭斗源)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자명종․천리경(千里鏡)·화포(火砲) 등 현대적 기계를 가져온 내용을 들 수 있다. 이러한 17세기 서양식 자명종의 도입은 조선에서의 금속제 기계 시계인 혼천시계(渾天時計)를 만드는 출발점이 되었다.
15세기 세종대(世宗代)에도 원(元)나라의 앞선 천문학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수력식(水力式) 혼의(渾儀)와 혼상(渾象, 천체 관측 기구로 천구의의 일종)이 있었으며, 이 전통을 이어받아 이민철(李敏哲, 1631∼1715)이 제작한 혼천시계도 있었다.
이때 제작한 수력식(물 항아리를 이용한 수력) 혼천시계 바탕 위에 서양의 자명종을 이용하여 기계식으로 제작한 것이 송이영(宋以穎)의 혼천시계인 것이다.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당시 기계 시계의 정밀성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진자를 이용한 탈진 장치를 짧은 시기에 그대로 재현하였기에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자격루로부터 이어지는 기술적 전통과 이를 계승․발전시키려는 조선 과학자들의 창조적 능력이 결합하여 이루어낸 성과물임에 틀림없다.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세계 시계 제작 기술 역사상 독창적인 천문 시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는 조선의 천문학과 과학 기술이 당시 초정밀 기술이자 하이테크 기술이었던 시계 제작 기술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것으로, 우리 조상들의 과학적 우수성을 그대로 입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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