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탈을 쓰고 양반의 탈을 잡던 탈놀이(탈춤)

튼씩이 2015. 12. 4. 13:59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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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8(2015). 12. 4.



“황금빛 탈을 쓴 그 사람
방울 채찍 손에 들고 귀신 부리네.
빨리 뛰다가 천천히 걸으며 추는 춤은
봉황이 너울너울 나는 듯 하구나."


9세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대면(代面)>이라는 시입니다. 특정한 인물이나 동물을 형상화한 탈 곧 가면을 쓰고 나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전통연극을 우리는 “탈놀이”, “탈춤”, “탈놀음”이라고 부르는데 처용무, 북청사자놀음, 은율탈춤, 오광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 따위의 탈놀이들이 있습니다. 위 최치원의 시로 미루어 보면 이미 신라시대에 탈놀이를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 신석기시대 유적인 부산 동삼동에서 나온 조개탈과 강원도 양구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탈이 있고, 4세기 중반의 고구려 안악 3호 무덤 벽화에도 탈춤 추는 사람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탈놀이의 역사는 무척이나 오래된 듯합니다. 특히 신라시대의 처용무는 고려와 조선시대는 물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장수 탈놀이지요.

다만 처용무처럼 오래 전의 탈놀이는 주로 귀신을 쫓기 위한 것이었지만 조선시대 이후 전승된 탈놀이들은 안동대 임재해 교수의 말처럼 “탈 잡는 일”을 하는 것들입니다. 백성은 지배층인 양반들에게 탈 잡을 일이 많았지만 대놓고 탈을 잡으면 바로 보복 곧 “뒤탈”을 당할 것이기에 탈을 써서 지배층의 눈길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거리낌 없이 탈을 잡았던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탈놀이를 통해 탈을 잡는 것은 지배층의 탈을 드러내 경종을 울리는 것과 함께 피지배층인 백성이 정신적으로 입는 탈 곧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탈놀이 조차 없었다면 백성들의 지배층에 대한 스트레스는 어떤식으로 나타났을지 짐작키 어렵습니다.

옛 얼레빗 (2011-12-06)


2211. 석전(石戰)을 보고 싶구나! 나를 말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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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은 내가 보기를 즐기는 것이니, 만약 이 놀이를 보고 나면 어찌 병이 나을는지 아는가.” 세종실록 12권(1421) 3년 5월2일자 기록에 보면 세종의 아버지 곧 태종이 이질을 심하게 앓아 몸이 편치 않음에도 석전놀이를 보러 나간다고 하여 말리는 대목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보입니다.

“나라 풍속에 이르길 5월 5일에 넓은 길에 크게 모여서 돌을 던져 서로 싸워서 승부를 겨루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석전(石戰)’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석전에 관해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사 권44에도 보일 정도로 오래된 세시풍속으로 전해 내려오던 놀이지요. 석전은 마을 놀이의 하나로 일정한 날을 정하여 갑·을 두 마을 주민 사이에 행하는 희전(戱戰)ㆍ석전(石戰)ㆍ줄다리기ㆍ차전(車戰) 따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석전은 돌을 던지는 놀이이므로 위험하여 성종이나 영조 임금 때는 이를 금지하기도 합니다만 일제강점기 때까지 석전놀이가 있었음을 알리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35살에 장렬한 죽음을 맞은 김상옥(1890.1.5-1923.1.22) 의사 이야기인데 김상옥 의사는 어린 시절 석전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항상 그의 어머니가 걱정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일제강점기 때까지 백성 사이에서 즐기던 놀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학설에 따르면 일제가 놀이를 금지했다고 하는데 별다른 무기가 없던 조선인들이 돌로 일본인들을 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을 거라는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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