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도끼를 곁에 두고 올린 지부상소와 기생초월의 상소

튼씩이 2015. 12. 23. 18:49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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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8(2015). 12. 17.



절대군주의 시대 고려와 조선에서 왕권을 견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상소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가 선비들이 올린 상소를 읽는 일이었지요. 상소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상소가 “지부상소(持斧上疏)”입니다. 지부상소는 지닐 지(持) 자에 도끼 부(斧)자를 쓰는데 곧 도끼를 옆에 놓고, 상소를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하로서 내가 올리는 상소가 부당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 도끼로 나의 목을 치라는 것이어서 폭군이라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부상소는 고려시대 충선왕의 실정을 지적하는 우탁 선생의 상소로부터 조선 중기 수렴청정을 하며 실권을 휘두르던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낱 과부로 깎아내린 남명 조식의 상소, 조선 말기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해 올린 면암 최익현 선생의 상소까지 목숨을 건 상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임금에게 가장 격렬한 그리고 용기 있는 상소문을 올린 이는 헌종 때 열다섯 살 기생 초월(楚月)을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미욱한 남편부터 시작하여 권세가의 살찌는 곳간, 갓난아이에게까지 물리는 병역세는 물론 임금의 주색(酒色)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고하고 “엎드려 원하오니 신을 죄주는 게 타당하다면 수레에 신의 팔다리를 매어 찢어 죽이는 차열(車裂)형에 처하고 종로 큰길 위에 조리돌린 연후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하여 만 사람의 혼이 돌아보지 않게 하소서.”라고 외칩니다. 겨우 15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의 결의가 우리의 오금을 저리게 합니다. 이 시대엔 정녕 구경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옛 얼레빗 (2011-12-13)


2215. 조선시대엔 일식을 무엇으로 관측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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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한반도에서는 개기월식을 관측할 수 있었죠. 월식은 특별한 장치가 없어도 관측이 되지만 해가 가려지는 일식은 어떻게 관측할까요? 해가 가려지긴 해도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맨눈으로 해를 오래 관측할 때에는 심각한 눈의 이상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셀로판지를 서너 겹 겹쳐서 보거나 태양필터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없었던 조선시대엔 어떻게 관측할 수 있었을까요?

영조 11년(1735년) 9월 1일 승정원일기에 보면 좌승지 이강보가 “일식은 월식과 달라서 물을 담아서 관찰합니다.”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햇빛이 수면에 닿으면 반사되어 보이는데 반사율이 낮아서 눈부시지 않은 점을 이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바람이 불면 수면이 흔들리기 때문에 해가 일그러져 보입니다. 그래서 상에 올려놨던 물그릇을 땅에 내려놓거나 주변에 바람막이 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또다시 영조실록 18년(1742) 5월 1일 조선왕조실록에는 “감관(監官)이 바람이 불고 물이 출렁거려 관측하기가 어려우므로 규일경(窺日鏡)으로 관측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규일경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 어떤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 천리경(千里鏡)이라 불린 망원경도 사용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규경이 쓴 ≪오주서종박물고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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